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편 의주목 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 / 평안도(平安道)동시 스크롤 의주목(義州牧) [DCI]ITKC_BT_B001A_0540_010_0010_2000_006_XML DCI복사 URL복사 동쪽은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1백 16리,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82리이고, 남쪽은 용천군(龍川郡) 경계까지 60리, 같은 군의 경계에 있는 양책관(良策館)까지 66리, 철산군(鐵山郡)경계까지 79리이고, 서쪽은 압록강(鴨綠江)까지 14리이고, 북쪽은 같은 강까지 2리이며, 서울에서는 1천 1백 86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거란(契丹)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고, 문종 때에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 일명 파주(把州). 라고 일컬었는데, 예종 12년에 요(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율녕(耶律寧) 등과 금(金)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도망해 와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문서를 보내어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속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서 병기ㆍ돈ㆍ곡물을 수습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덜어다가 채워서 그제서야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인종 4년에 금(金)이 또한 주(州)를 가지고서 귀속하였다. 고종 8년에는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서 함신(咸新)이라고 일컬었다가 곧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공민왕 15년에 승격해서 목(牧)으로 하였고,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어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설치하고, 각각 상천호(上千戶)ㆍ부천호(副千戶)를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2년에 비로소 판관(判官)을 두고 정주(靜州)와 위원진(威遠鎭)으로 내속하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 2 철산(鐵山)ㆍ용천(龍川).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편의 흥화진 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편의 흥화진 부분 [고영주(古靈州) 주의 남쪽 5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의 흥화진(興化鎭)이었는데, 현종 23년에 영주로 승격시켜서 방어사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주를 폐하여 내속시켰다. 토성 터가 있는데, 둘레가 2천 5백 80척이다. ○ 고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강조(康兆)를 토벌하려고 흥화진을 에워싸매 양규(楊規)가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호부 낭중(戶部郎中) 정성(鄭城), 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主簿) 이수화(李秀和), 판관(判官) 늠희령(廩羲令) 장경(張顥)과 더불어 성에 틀어박혀 굳게 지켰는데, 거란 임금이 거짓으로 강조의 글을 써서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거늘 양규가 이르기를, “나는 왕명(王命)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지 않았다.” 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뒤에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내침(來侵)하매 강감찬(姜邯贊)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를 삼고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으로 부장(副將)을 삼았다. 군사 20만 8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고, 흥화진에 가서 선기병(選騎兵) 1만 2천 명을 산골짜기 가운데에 매복시키고,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서 성의 동쪽에 있는 큰 강을 막고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것을 트고 복병을 일으켜서 크게 패배시켰다.  古靈州。在州南五十五里。本高麗興化鎭。顯宗二十三年,陞靈州,置防禦使。本朝廢州來屬。有土城基,周一萬二千五百八十尺。○高麗顯宗元年,契丹主自將來,討康兆,圍興化鎭。楊規爲都巡檢使,與戶部郞中鄭成、副使ㆍ將作主簿李守和、判官ㆍ廩羲令張顥嬰城固守。契丹主詐爲兆書,遺興化鎭諭降,楊規曰:“我受王命而來,非受兆命。” 不降。後,契丹蕭遜寧來侵,以姜邯贊爲西北面行營都統使,大將軍姜民瞻副之,帥兵二十萬八千人,屯寧州。至興化鎭,選騎兵萬二千,伏山谷中,以大繩貫牛皮,塞城東大川以待之。賊至,決塞發伏,大敗之。]_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편의 흥화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