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편 의주목 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 / 평안도(平安道)동시 스크롤
의주목(義州牧)
[DCI]ITKC_BT_B001A_0540_010_0010_2000_006_XML DCI복사 URL복사
동쪽은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1백 16리,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82리이고, 남쪽은 용천군(龍川郡) 경계까지 60리, 같은 군의 경계에 있는 양책관(良策館)까지 66리, 철산군(鐵山郡)경계까지 79리이고, 서쪽은 압록강(鴨綠江)까지 14리이고, 북쪽은 같은 강까지 2리이며, 서울에서는 1천 1백 86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거란(契丹)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고, 문종 때에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 일명 파주(把州). 라고 일컬었는데, 예종 12년에 요(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율녕(耶律寧) 등과 금(金)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도망해 와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문서를 보내어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속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서 병기ㆍ돈ㆍ곡물을 수습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덜어다가 채워서 그제서야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인종 4년에 금(金)이 또한 주(州)를 가지고서 귀속하였다. 고종 8년에는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서 함신(咸新)이라고 일컬었다가 곧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공민왕 15년에 승격해서 목(牧)으로 하였고,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어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설치하고, 각각 상천호(上千戶)ㆍ부천호(副千戶)를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2년에 비로소 판관(判官)을 두고 정주(靜州)와 위원진(威遠鎭)으로 내속하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 2 철산(鐵山)ㆍ용천(龍川).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토관】 도할사(都轄司) 도할(都轄)ㆍ전사(典事) 각 1인.전례서(典禮署) 감부(勘簿)ㆍ급사(給事)ㆍ섭사(攝事) 1명씩.융기서(戎器署)ㆍ사창서(司倉署) 장사(掌事)ㆍ섭사 각 1인.전주국(典酒局) 급사ㆍ섭사 각 1인.사옥국(司獄局) 섭사 각 1인.진강위(鎭江衛) 여과(勵果)ㆍ부여과(副勵果)ㆍ여정(勵正)ㆍ부여정(副勵正) 각 1인. 여맹(勵猛) 2인. 부여맹(副勵猛) 3인. 여용(勵勇) 4인. 부여용(副勵勇) 5인. ○ 토관 이하는 함경도 경원부(慶源府)와 같다.
【군명】 용만ㆍ화의ㆍ보주ㆍ포주ㆍ파주ㆍ함신ㆍ송산(松山).
【성씨】 본주 장(張) 안동(安東)ㆍ화녕(化寧). 최(崔) 강릉(江陵). 독고(獨孤).정주(靜州) 윤(尹) 평산(平山). 김(金) 평산ㆍ정안(廷安)ㆍ김해(金海). 조(趙) 충주(忠州).인산(麟山) 이(李)ㆍ유(柳) 모두 밀성(密城). 서(徐) 충주. 최(崔) 해주(海州).영주(靈州) 김(金) 용강(龍岡).위원(威遠) 백(白) 백주(白州). 임(任)ㆍ유(柳)ㆍ노(盧) 모두 풍주(豐州). 서(徐) 광양(光陽).정융(定戎) 조(趙)ㆍ김(金) 안악(安岳). 임(任) 충주. 이(李) 안동ㆍ옹진(甕津). 고(高) 삼화(三和).영덕(寧德) 김(金) 은률(殷栗). 임(林) 구현(丘縣). 양(楊) 당악(唐岳).영삭(寧朔) 김(金)ㆍ강(康) 모두 장연(長淵). 오(吳) 해주.
【풍속】 풍기(風氣)가 굳세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사냥[畋獵]을 좋아한다. 지지(地志).
【형승】 압록강이 천연적인 도랑을 이루고 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낙랑(樂浪)이 지경을 나누었다. 기순(祁順)의 시에서.
【산천】 송산(松山) 주에서 동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진산이다. 미라산(彌羅山) 주에서 남으로 1백 리 떨어져 있다. 본래는 용천군의 땅이었는데, 성화(成化) 12년에 갈라 주에 붙였다. 어전(魚箭 고기 잡는 기구, 통발)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용천군 사자도(獅子島)의 남쪽에, 하나는 북쪽에 있다. 염분(鹽盆)이 2군데 있다. 백마산(白馬山) 주에서 남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흰 용마(龍馬)가 나와서 논 까닭에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두산(馬頭山) 주에서 남으로 80리 떨어져 있다. 화엄산(華嚴山)ㆍ천마산(天磨山) 모두 고정녕(古定寧)의 북쪽에 있는데, 주에서 1백 50리 떨어져 있다. 천마산은 삭주(朔州)에 또 나온다. 판막현(板幕峴) 주에서 동북으로 1백 16리 떨어져 있다. 가두등현(加豆等峴) 주에서 동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진병곶(鎭兵串) 주에서 남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바다 주의 남쪽에 있다. 구룡연(九龍淵) 주에서 북으로 8리 떨어져 있다. 못의 남쪽에 토성(土城) 터가 있는데, 둘레가 6백 척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합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 중 한 사람은 못 위에 있는 토성에 살고 있으며, 한 사람은 주성(州城) 안에 살고 있는데, 정주 호장(戶長) 김유간(金裕幹)이 꾀로써 쫓아내려고 거짓말로, “우리나라가 어느 날 밤에 너희들을 섬멸하려고 한다.” 하고, 그 밤에 이르러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해 놓고서 보게 하였더니, 합단 등이 그럴 듯하다 하여 곧 성을 비우고 강을 건너 도망하였다. 그러나 강 위에는 타고 건너갈 배가 없었으므로 김유간이 마음에 이상히 여겨 자세히 보니 강 북쪽 근변에 철우(鐵牛)를 잠겨[沈] 세우고 또 쇠사슬로 남쪽 강가의 바윗돌 사이에 고정시키니 그 소의 등[背]을 부교(浮橋)로 삼아 건너는 것이었다. 김유간이 곧 다리를 파괴하여 다시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영락(永樂) 무자년에 주성(州城)을 쌓을 때에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쇠사슬을 건져서 성문(城門)의 자물쇠[鎖鑰]를 만들고, 그 철우는 못의 모래 속으로 침몰되었으므로 다시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신룡(神龍)이 진인(眞人)과 같으니 그 변화를 어찌 측량할 수 있으랴. 하늘을 오르내리기 일순간인데, 이 창산(蒼山) 곁에 자리잡았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가득한 푸른 물은 몇 백 길이뇨, 옥거울이 티끌 받아들이지 않았네. 신물(神物)이 정말 그 속에 있음직하니, 때때로 못 가운데 하얀 기운 있네. 영단(靈壇)을 물가에다 누가 쌓았나, 북 치고 춤추며 빌기를 지금껏 하네. 굴원(屈原)처럼 구가(九歌)를 짓지 못해 한스럽구나, 물속에 어린옥(魚鱗屋)만 보일 뿐일세.” 하였다. 압록강(鴨綠江) 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마자(馬訾) 또는 청하(靑河) 또는 용만(龍灣)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요동도사(遼東都司)와 거리가 5백 60리며, 그 근원은 만주(滿洲) 땅의 백두산에서 나오고, 수백 리를 남으로 흘러서 함경도의 갑산(甲山)ㆍ삼수(三水)를 거쳐 본도의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ㆍ자성(慈城)을 지나서, 강계(江界)와 위원(渭源)의 지경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치고, 이산군(理山郡)의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포주강(蒲洲江 근원이 건주위(建州衛)에서 나왔다.)과 합치고,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치고,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소삭주(小朔州)를 거쳐서 주의 북쪽에 있는 오적도(於亦島)의 동쪽에 이르러 3파로 나뉘어서, 하나는 남으로 흘러 맴돌아 모여서 구룡연이 되는데 이름이 압록강이다. 그 물빛이 오리의 머리같이 푸르므로 이름 지었고,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그 가운데로 흐르므로 소서강(小西江)이라 하였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하나로 합쳤다가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가닥으로 나뉘어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 압록강의 서북쪽에 있다.)과 합치고 하나는 남으로 흘러 대강(大江)이 되고, 위화도(威化島)를 둘러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미륵당(彌勒堂)에 이르고 다시 적강과 합쳐서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서해(西海)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여진(女眞)이 사는 곳에 압록강이 있다.”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천하에 세 군데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黃河)ㆍ장강(長江 양자강(楊子江))ㆍ압록이라 하는데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 《송사(宋史)》에, “고려가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다. 강의 넓이가 3백 보이고, 그 동쪽에는 바닷물이 맑아서 열 길 물속이 내려다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명주(明州)와 바라보이며 물이 다 파랗다.” 하였다. 대명(大明)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시에, “압록강 맑은 물이 봉토(封土)의 한계를 그었는데, 폭력(暴力) 없고 사기(詐欺) 그쳐 평화를 즐기었네. 망명한 죄인(罪人)을 받지 않아 천 년의 복이요, 예의(禮義)를 모두 닦아 백세의 공일세. 한(漢) 나라가 친 것은 기록에 밝혀 있고, 요(遼) 나라가 친 것은 자취로써 알겠네. 정회(情懷)가 하늘 복판까지 닿았으니, 물은 풍파 없고 수자리에는 일 없네.” 하였다. ○ 명 나라의 중 원암(圓庵)이 천자의 명을 받아 지은 시에, “싸늘한 강 한 줄기 물이 고요하게 흐르니, 압록이 아득한데 저녁 바람 드날리네. 근원은 백산(白山)에 비롯하여 멀리 흘러나왔고, 형세는 창해(蒼海)와 나누어 허공[鴻濛]에 닿았구나. 논밭에 흘러드니 백성들 기뻐하고, 뱃길이 편리하니 객로(客路)가 트였구나. 임금의 은혜 물결 곳곳에 흡족하니, 온 천지가 모두 다 영토 안에 들었네.” 하였다. ○ 권근(權近)이 천자의 명을 받아 지은 시에, “변방 고을 쓸쓸한데 나무 늙었고, 한 줄기 긴 강은 요양(遼陽)을 가로막았네. 황풍(皇風 천자의 덕화)은 중국과 조선을 가리지 않는데, 지리(地理)는 어찌하여 피차(彼此)를 구별하랴. 물결은 조각배를 흔드는 것 맡겨두고 천일(天日)이 하황(遐荒 멀고 거친 곳, 미개한 곳)까지 비추는 것을 기쁘게 보겠네. 누가 이 발길 바쁜 뜻을 알랴, 천자 말씀 받들어 우리 님께 아뢰려네. ○ 나라에는 지경이 험한 곳 있네, 하늘이 주어 지리(地利)도 웅걸(雄傑)하도다. 세 강물 하도 깊어 헤아릴 길 없는데, 이 한 길[道] 멀어서 통하기 어렵네. 강이 넓어 물결이 바다에 잇달았고, 바람에 파도 일어 하늘에 잇닿았네. 작은 배 화살같이 빠르니, 탈없이 건넌 것은 사공의 덕일세.” 하였다. ○ 명 나라의 중 보흡(溥洽)의 시에, “압록강 가을 물결 바닥까지 맑은데, 도도(滔滔)히 흘러내려 고금의 정(情)이 끝없네, 항번(降幡 항복하는 표시로 내어 거는 기)은 마침내는 평양에 왔음을 보았고, 수책(受幘)은 한갖 작은 성을 쌓았음을 들었네. 새벽 배 떠나가자 서릿기운 하얗고, 맑은 물에 말 먹이매 눈송[雪花]이 밝구나. 뉘라서 이 강물을 천참(天塹 천연적인 도랑)이라 했던가, 가없는 경해(鯨海 고래가 노는 큰 바다) 또한 이미 평정해졌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의주는 우리나라 문호(門戶)이어서, 예로부터 중요한 관방(關防)이네. 장성(長城)은 어느 해에 쌓았는가, 꾸불꾸불 산 언덕을 따랐네. 넓고 넓은 말갈(靺鞨)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흘러 봉강(封疆)을 경계지었네. 내가 벌써 천 리를 떠나왔는데, 여기 와서 이렇게 머뭇거리네. 내일 아침 강 건너 떠나가면, 요동 벌판에 하늘이 망망하리라.”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그럭저럭 오고 보니, 압강(鴨江) 가일세, 물색(物色)은 그전대로 고국이건만, 이상하다 서로 만나는 것 모두 새롭고, 신시(新詩)는 태반이나 화언(華言 중화의 말) 섞였구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임금의 명 받들고 천자 뵈러 떠나와 가는 길 탐을 내어서 밤에 얼음 건너네. 깊은 곳 다다라서는 마음 졸여 떨리고, 얇은 곳을 밟으면 얼음 깨지는 소리 들리네. 사신의 법도 고루 알지 못하니, 임금의 은혜 갚을 길 없네. 수달피 갖옷[貂裘]은 가는 길에 떨어져가니, 내일 새벽 또 일찍 일어나야지.”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남풍이 객로(客路)에 불어주고, 석양이 고국땅을 비춰 주누나. 가랑비에 물결소리 들리는데, 넓은 둑에 풀빛이 싸늘하구나. 북쪽으로 가면 만리 통하고, 동쪽으로 가면 삼한(三韓)에 닿네. 사마(駟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내 낯엔 부끄러움 가득하구나.”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일찍이 압록강을 들었었는데, 오늘에야 강 가운데 지나는구나. 벼랑진 강기슭은 천 길 넓이요, 단단한 얼음장은 열 길 깊일세. 잘도 가누나 동국(東國) 말[馬]은 튼튼도 하네. 마중나온 원인(遠人 먼 곳 사람. 여기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의바르네. 지경을 달리하니 이하(夷夏 이는 우리나라, 하는 중국) 갈렸지, 청산(靑山)이야 예 이제가 마찬가질세.”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압록강 멀리 만경(萬頃) 물결은 오늘 아침 또다시 사신[使星]을 싣고 지나네. 물새들 있는 곳에 바람 물결 고요하고, 물가 풀꽃 있는 곳에 비와 이슬이 많구나. 계수나무 노가 물길 타니 깃과 같이 가볍고, 운산(雲山)이 보이는데 소라같이 푸르구나. 봉지(鳳池)와 용소(龍沼)를 떠난 지 오래인데, 머리 돌리니 그 감개를 어찌하랴.”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산 경치 강 물결을 익히 봤는데, 황홀한 훈풍(薰風) 사월(四月)이 지났네. 강가에 오니 벌써 조신(潮信) 빠른 줄 알겠고, 지름길 많은 것 싫지 않구나. 농부는 삿갓 쓰고 밭을 매는데, 해객(海客)은 배를 타고 조개와 소라를 줍네. 조각배로 월남(越南)하니 풍경 좋으니, 지나는 길 야정(野情)이 없을 수 있나.”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낙랑의 나뉜 지경 요(遼)까지 닿았는데, 이 한 강이 가로질러 멀리멀리 푸르네. 장백산(長白山)에 비롯하여 산을 깊이 파면서, 동영(東瀛)으로 흘러서 바닷물과 섞이네. 양편 물가 산광(山光)은 갠 날에 옥을 담갔고, 사시(四時)의 운영(雲影)은 차[冷]게 하늘 적셨네. 행인(行人)은 어별(魚鼈)을 부를 필요 없구나, 굳은 얼음 스스로 다리를 만들었네.”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물이 깊은 긴 강의 만경(萬頃)에 가을인데, 누선(樓船)은 누가 보내 사두(沙頭)에서 기다리나. 물결 깨며 날아 넘기 특히 좋아하고, 채찍 던져 물 끊다니 믿을 수 없네. 정모(旌旄)에 바람 부니 적치(赤幟)가 나부끼고, 융막(戎幕)에 밤이 차[寒]니 청유(靑油)를 꼈구나. 동주(銅柱) 세워 분계를 멀리할 필요 없네, 저편 기슭 인가들이 바로 의주이네.” 하였다.
옥강(玉江) 주에서 동북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천마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서 산양천(山羊遷)에 이르러 합쳤고, 다시 50리를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며, 강 가운데에서 담청옥(淡靑玉)이 나 붙여진 이름이다. 고진강(古津江) 주에서 동남으로 36리 떨어져 있다. 그 근원이 셋인데, 하나는 천마산의 동남에서 나오고, 하나는 그 서남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보광산(普光山)의 북쪽에서 나와서 미륵당(彌勒堂)에 이르러 모두 합쳐서 고정령을 거쳐 10여 리 내려가서 광화도(廣化島)에 이르러 이 강이 되고, 다시 남으로 흘러서 고령주(古寧州)를 거쳐 고린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書狀官) 강기수(姜耆壽)가 익사(溺死)하였으므로 서장강(書狀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적도(於赤島) 난자도(蘭子島)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7리이다. 그 안이 평평하고 넓어서 밭 60여 두둑을 일구었다. 검동도(黔同島) 주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압록강이 여기에 이르러서 세 갈래로 나뉘는데 이 섬이 두 섬 사이에 있으며, 삼씨량(三氏梁)이 있다. 모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섬의 북쪽을 거치는데 중국 서울로 가는 사신이 입조(入朝)하는 길이기도 하다. 위화도(威化島)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검동도와 위화도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掘浦)라고 일컫고 주성(州城)에서 25리 떨어졌다. 위의 세 섬들은 그 땅이 모두 기름지고 넉넉하여서 백성들이 많이 개간해 경작했었는데, 천순 5년 신사에 농민들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에게 잡혀가 그 뒤부터는 관(官)에서 개간을 금하였다. ○ 고려의 신우(辛禑)가 요양(遼陽)을 치기를 꾀하여 평양에 주둔해서 여러 도(道)의 군사와 민중을 감독해 징집하여 10만을 일컬었다. 우리 태조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좌군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주둔하는데, 도중에서 도망병이 계속되니 우(禑)가 곳곳마다 죽이라고 명령하였어도 막을 수 없었다. 우가 환자(宦者) 김완(金完)을 보내어 진군할 것을 독령(督令)하거늘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만약 상국(上國)의 지경을 침범한다면 천자에게 죄를 얻어 나라와 백성에게 재앙이 곧 올 것이니, 어찌 경(卿)들과 임금을 뵙고 친히 화(禍)와 복(福)을 아뢰고, 임금 곁의 나쁜 사람들을 제거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을까 보냐.”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이르기를, “우리 동방의 사직(社稷)이 편안하고 위태한 것은 공(公)의 한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찌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래서 군사를 돌려 압록강을 건넜는데, 태조가 흰 말을 타고 붉은 활과 흰 깃 화살을 가지고서 물가에 서서 여러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는데, 모든 군사 가운데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 “고금, 그리고 앞으로 올 세상에서도 어찌 이러한 인물이 있겠느냐.” 하였다. 당시에 장마가 며칠 내렸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군사가 겨우 다 물 기슭에 건너자 큰물이 몰려와서 온 섬이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난자도(蘭子島) 위화도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수위(水位)가 내려가면 육지에 이어진다. 조몰정도(鳥沒亭島) 주에서 서쪽으로 7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진병지(鎭兵池) 인산진성(麟山鎭城)의 남쪽에 있다. 임덕지(臨德池) 고린산에 있다. 노토동(老土洞) 이하는 모두 압록강 밖의 땅에 속한다. 감창동(甘昌洞)ㆍ손양동(孫梁洞)ㆍ신호수동(申胡水洞)ㆍ금창동(金昌洞)ㆍ마자산(馬子山)ㆍ다양동(多陽洞)ㆍ파사포(婆娑鋪)ㆍ사오랑산(沙吾郞山)ㆍ형제산(兄弟山)ㆍ대모성(大母城)ㆍ권두산(權豆山)ㆍ소창산(小昌山)ㆍ대창산(大昌山)ㆍ송골산(松鶻山).
【토산】 사(絲)ㆍ삼[麻]ㆍ꿀[蜂蜜]ㆍ누치[訥魚]ㆍ숭어ㆍ은어[銀口魚]ㆍ쏘가리[錦鱗魚]ㆍ농어, 석류황(石硫黃) 객사(客舍)의 뜰 안에 난다. 담청옥(淡靑玉)ㆍ부석[水泡石]ㆍ백지(白芷)ㆍ애끼찌[弓幹木]ㆍ게[蟹].
【성곽】 주성(州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4천 83척, 높이가 12척이고, 안에는 40군데의 우물이 있다. 『신증』 금상(今上) 15년에 옛 성이 좁으므로 고형산(高荊山)을 보내어 편리 여부를 두루 살피게 하고 드디어 터를 닦고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2만 7천 5백 31척, 높이가 12척이고, 동ㆍ남ㆍ서ㆍ북에 모두 문이 있고, 문에는 옹성(擁城)이 있고, 성안에는 한 개의 못과 43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방산진(方山鎭) 주에서 동북으로 61리 떨어져 있다. 본조 세종 때에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8천 7백 82척, 높이가 8척이고, 안에는 7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아(營衙)가 있다. 인산진(麟山鎭) 주에서 서남으로 38리 떨어져 있다. 본조 세종 때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8천 2백 6척, 높이가 9척이고, 안에는 9개의 샘물과 군창이 있고, 병마첨절제사의 영아가 있다. ○ 이상은 첨절제사가 각 1인. 수구보(水口堡) 주에서 동으로 28리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만호(萬戶)를 두었으나 지금은 폐지하였고, 여름에는 권관(權管)을 보내 수어(守禦)하게 하고, 겨울에는 본도(本道)로 철수하는데, 연변의 다른 보(堡)도 같다. 석종 24년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73척이다. 청수보(靑水堡) 주에서 동북으로 95리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만호를 두었으나 지금은 폐지하였고, 권관을 보내 지키게 한다. 성종 24년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86척이다. 소관보(所串堡) 주에서 동남으로 35리 떨어져 있는데, 속칭 대모성(大母城)이라 한다. 겨울에는 조방장(助防將)을 보내 수어하게 하고, 봄 여름에는 폐지한다. 성종 23년에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천 7백 12척이고, 안에는 5개의 우물이 있다.『신증』 고미성보(姑未城堡) 주에서 동북으로 87리 떨어져 있다. 돌성인데, 둘레가 6백 46척, 높이가 7척이다. 광평보(廣坪堡) 주에서 동으로 1백 15리 떨어져 있다. 돌성인데, 둘레가 1백 10척, 높이가 8척이다. 옥강보(玉江堡) 주에서 동북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돌성인데, 둘레가 7백 44척, 높이가 5척 5촌이다. 송산보(松山堡) 주에서 동으로 12리 떨어져 있다. 벽돌[甎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8백 55척, 높이가 8척이다. 가정(嘉靖) 병술년에 보 안에서 실화(失火)가 있어 민가와 성이 다 탔는데, 절도사(節度使) 정윤겸(鄭允謙)이 고쳐서 목책(木柵 통나무 등으로 만든 울타리)을 설치하였다. 이상 네 보는 권관(權管)을 두어 지키게 한다. 성고개보(城古介堡) 주에서 동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석성인데, 둘레가 8백 90척, 높이가 9척이다. 겨울에는 절도사가 조방장을 보내 지키게 하고, 얼음이 풀리면 폐지한다. 이상 다섯 보는 홍치(弘治) 경신년에 경변사(警邊使) 이극균(李克均)이 설치하였다.
【봉수】 통군정봉 봉수(統軍亭峯烽燧) 동으로 수구(水口)에 응하고, 남으로 위원에 응한다. 수구 봉수(水口烽燧) 동으로 금동전동(金同田洞)에 응하고, 서쪽으로 통군정봉에 응한다. 금동전동 봉수(金同田洞烽燧) 주에서 동북으로 74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노토탄(老土灘)에 응하고, 서쪽으로 수구에 응한다. 노토탄 봉수(老土灘烽燧) 주에서 동북으로 97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삭주부의 전왕구비(田往仇非)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금동전동에 응한다. 위원 봉수(威遠烽燧) 주에서 남으로 26리 떨어져 있는데, 북으로 통군정봉에 응하고, 남으로 도산(刀山)에 응한다. 도산 봉수(刀山烽燧) 주에서 서남으로 48리 떨어져 있는데, 북으로 위원에 응하고, 남으로 용천군의 용호산(龍虎山)에 응한다.『신증』 정자산 봉수(亭子山烽燧) 고미성보에서 동북으로 8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노토탄에 응하고, 서쪽으로 금동전동에 응한다. 송봉 봉수(松峯烽燧) 방산진에서 남으로 3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금동전동에 응하고, 서쪽으로 부동에 응한다. 부동 봉수(浮洞烽燧) 옥강보(玉江堡)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송봉(松峯)에 응하고 서쪽으로 수구에 응한다. 석계 봉수(石階烽燧) 송산보에서 동북으로 8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수구에 응하고 서쪽으로 구룡연(九龍淵)에 응한다. 구룡연 봉수(九龍淵烽燧) 주에서 북으로 8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석계에 응하고, 서쪽으로 통군정봉에 응한다. 오언대 봉수(吳彦代烽燧) 주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통군정봉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정주(古靜州)에 응한다. 고정주 봉수(古靜州烽燧) 주에서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오언대에 응하고, 서쪽으로 쇄아점(鎖兒岾)에 응한다. 쇄아점 봉수(鎖兒岾烽燧) 주에서 서쪽으로 28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고정주에 응하고, 서쪽으로 인산진에 응한다. 인산진성서우 봉수(麟山鎭城西隅烽燧) 진성 안의 서쪽에 있는데, 동으로 쇄아점에 응하고, 서쪽으로 기이성(岐伊城)에 응한다. 기이성 봉수(岐伊城烽燧) 인산진에서 서쪽으로 6리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 인산진에 응하고 서쪽으로 진병곶(鎭兵串)에 응한다. 진병곶 봉수(鎭兵串烽燧) 인산진에서 남으로 9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기이성에 응하고, 서쪽으로 미륵당(彌勒堂)에 응한다. 미륵당 봉수(彌勒堂烽燧) 인산진에서 남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진병곶에 응하고, 서쪽으로 우리암(于里巖)에 응한다. 우리암 봉수(于里巖烽燧) 인산진에서 남으로 25리 떨어져 있는데, 동북으로 미륵당에 응하고, 서남으로 용천군의 대산(代山)에 응한다.
【누정】 통군정(統軍亭) 객관 북쪽에 있다. ○ 임사홍(任士洪)의 기명에 “주성(州城)이 압록강에 임하였으니, 그 북은 여진씨(女眞氏)의 지역이고 그 서쪽은 중국의 경계이다. 섬들이 둘러 있고 언덕과 산들이 높고 험하며 대창ㆍ소창ㆍ송골이라는 여러 산이 멀고 가까운 데에서 층층이 나타나고 겹겹이 보여 중화(中華)의 산하(山河)와 성곽(城郭)의 장려(壯麗)함을 연상할 수 있는데, 바로 주의 북에 산봉우리가 뾰죽이 서 있어서 사방에 통하여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위에 정자가 있어 통군(統軍)이라 하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누가 이름 지었는지는 모른다. 청성(淸城) 한후(韓侯) 천손(千孫)이 나와 목사(牧使)가 되어 통판(通判 관직명) 김철손(金哲孫) 군과 꾀하여 옛 규모를 늘이고 기와집으로 고쳤다. 무술년 여름에 내가 죄를 짓고 이 고을에 귀양오게 되었다. 정자의 공역이 겨우 끝나니 환히 빛나고 날아갈 듯하고 굉창헌활(宏敞軒豁 둘 다 건물이 넓고 크고 높은 것)하여 그 조망(眺望)이 더욱 멀어지고, 그 경치가 더욱 좋아졌다. 하루는 후가 고을의 좌리(佐吏)를 거느리고 그 위에서 잔을 들고 그 아래에서 활을 쏘아서 낙성하니, 관하(管下)에 나그네로 와 있는 비생(鄙生)이 자리 끝에 참여하게 되었다. 후가 이르기를, “의주가 있은 이래로 봉우리의 높고 험준함이 이미 이와 같으니 몇 사람이나 올라와 바라보고서 나라를 떠나고 고향을 떠난 회포를 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이란 정자가 있는 것이고 정자라면 이름이 있는 것이 원래 그 상례입니다. 내가 마침 이 고을에 원으로 있다가 지금 또 목사가 되었으며, 당신 또한 임금의 후설(喉舌)이 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러서 대죄(大罪)를 범하여 쓸쓸하게 멀리 외딴 고장에 있어 미록(麋鹿)과 더불어 논다는 것은 더욱 주(州)로서는 듣기 드물고 보기 드문 바입니다. 내가 거듭 온 것이 한 가지 어려운 일이요, 정자가 낙성됨이 둘째 어려운 일이요, 당신이 귀양온 것이 셋째 어려운 것인데, 당신이 만약 기문을 짓지 않는다면 뒤에 여기 오르는 사람이 무엇을 연유해 세 가지 어려움이 쉽지 않다는 뜻을 알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이 나그네에게 편지를 부쳐서 아울러 편액 쓰기를 청하였다. 내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데에는 모두 잘하지 못하는 바이나 후의 명을 받고서 감히 잘 못한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주의 적(籍)에 기록된 것이 무려 만여 호(戶)이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가 번잡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군사를 거느린다는 것으로 이름함은 어찌하여서인가. 내지(內地)의 주현(州縣)으로는 군사의 임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마는 백성 다스리는 것을 주(主)로 하고, 변방에서 변방을 지키는 자는 백성 다스리는 정사도 힘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훈련(訓鍊)하기에 전심(專心)하게 되니 이는 국가가 군ㆍ민의 일을 나누어서 둘로 하지 못하고 또한 합해서 하나로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주군(州郡)이 소재하는 땅에 따라서 목수(牧守)ㆍ군려(軍旅)의 직분이 또한 다르게 된 것이라. 이 고을의 땅은 우리 동방의 서북 끝의 경계이며, 남으로 서울과 1천 5백여 리 떨어졌고, 세 방면으로 다른 나라에 끼어 있으므로 이 고장에 와서 목사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재질이 문ㆍ무를 겸하고 정사가 군ㆍ민에 통한 뒤에라야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지금 후는 조정의 의론의 높이는 바가 되어, 다시 여기를 맡아서 변방의 진(鎭)을 열어 이하(夷夏 우리나라와 중국)를 대하여 그 은혜는 봄날 같아서 능히 늙은이와 어린이를 온화하게 하고, 그 위엄은 추상(秋霜) 같아서 능히 부오(部伍)를 엄숙하고 민첩하게 하며, 중국의 손님을 영접하는 데에는 그 성의와 공경을 다해서 우리 전하의 사대(事大)하는 예의를 밝히고, 풍속이 틀린 여진을 대접하는 데에는 그 가고 오는 것을 순하게 하며 그 어루만지기를 극진히 해서 전하를 받들어 그 무외(無外)의 인(仁)을 드러내니, 이는 후의 다스림이 하나를 주로 하면서 둘을 겸하고 그 큰 것을 총리(總理)하여 그 작은 것을 따르도록 한 것이니 마땅히 국가가 분우(分憂)와 분곤(分閫)의 중책을 받들어 한 지방의 권력을 오로지하게 한 것이다. 군사를 호궤(犒饋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한 뒤에 친히 용맹스러운 병사를 거느리고 천만(千萬)으로 대오를 만들어 이 정자 아래에 포진하되 왼편으로 하고 싶은 자는 왼편으로, 오른편으로 하고 싶은 자는 오른편으로 앉고, 일어나고 나아가고 물러섬에 호령이 엄하며 기강이 정숙(整肅)하고, 일당(一堂) 안에서 운주(運籌)하고 천 리 밖에서 절충(折衝)함에, 싸우지 않고서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기니 어찌 이 정자의 이름됨이 족히 후의 군율을 보게 되는 것이요, 가공(架空)한 헛된 호칭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까 보냐.”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용만(龍灣) 옮긴 곳에 주성(州城)을 두었는데, 말 위에서 멀리 보니 눈 더욱 밝네. 진중(珍重)한 통군봉 한 모임이, 강 건너에 분주히 웃고 서로 맞이하네.” 하였다.
『신증』 조위(曹偉)의 시에, “백 길 높은 층층한 성이 아득한데, 붉은 난간 종일토록 기대었네. 새원(塞垣)에는 호표(虎豹)들이 엄하고, 바다에는 곤붕(鵾鵬)들이 펼치는구나. 지세(地勢)는 서와 남이 트여 있고, 천룡(天龍)은 위아래로 맑네. 배회(徘徊)하여 끝없는 뜻은 호기(豪氣)가 진등(陳登)보다 갑절 더하네. ○ 마자(馬訾 압록강의 별칭)의 나뉜 지경 멀고, 용만(龍灣)의 옛 요새가 쓸쓸하구나. 강류(江流)는 금대(襟帶)를 굳게 하였고, 지세는 한병(翰屛 지세가 높고 깎은 듯이 험준함)이 웅장하네. 세 섬[島]은 논밭 가는 바깥에 있고, 고성(孤城)은 부락 가운데 있네. 늦게 와서 긴 한숨 쉬고 서 있는데, 석양이 강 위 가득 비끼고 있네. ○ 사방을 둘러보니 막힌 것이 하나도 없어, 망망한 만상(萬象)들이 분주하구나. 한 조각 마음은 우주의 끝까지, 두 눈엔 하늘땅이 좁네. 해가 지니 강광(江光)이 흔들거리고, 연기가 사라지니 해기(海氣) 짙구나. 장군(將軍)은 오늘날의 극곡(郤縠)이라, 나라의 서쪽문을 굳게 지키네. ○ 경치는 예전부터 제일 좋아서 금탕(金湯 견고한 성곽과 성지)이라 만고에 들려 왔네. 울타리는 오랑캐에 대비하였고, 비예(睥睨 성 위에 있는 벽)는 찬 구름[寒雲]을 가로막았네. 고각(鼓角)은 군성(軍聲)을 웅장히 하고, 강과 산은 경계를 나누고 있네. 무비가 묘략(廟略 조정(朝廷)의 계략)에 이르니 오래도록 수문(修文)만 믿지 말라.” 하였다.
○ 권달수(權達手)의 시에, “옛 요새엔 성곽이 천 길이나 되고, 화정(華亭)엔 객이 함께 기대었구나. 산형(山形)은 물가 나라[澤國] 두르고 있고, 도세(島勢)는 구름 붕새[鵬] 떨어뜨리네. 물은 세 갈래를 지어서 넓고, 강은 만상(萬象)을 담가서 맑네. 취해 오니 호탕스러운 흥취가 일어, 길게 휘파람 불며 손등(孫登)을 본받네.
○ 땅 다한 데 강물이 경계지었고, 하늘 넓은 데 나무가 공중에 떴네. 진(鎭)은 관서(關西)의 요지(要地)요, 정자는 새북(塞北)에 웅장하네. 구름은 푸른 산 밖에서 일고, 사람은 석양(夕陽) 안에 의지해 섰네. 얼굴 쇠(衰)함이 오랬음을 스스로 웃고, 석 잔 술로 붉은빛이 다시 이네.
○ 한번 이 정자 위에 올라오니, 여러 산이 눈 아래 분주하구나. 트이기는 초택(楚澤) 머금어 들였고, 크기는 하늘땅을 들이려 하네. 운영(雲影)은 하늘과 아울러 고요하고, 성(城) 그늘은 물은 띠었네. 강 경치는 저녁 늦게 더욱 좋은데, 머물러 달이 문에 들기를 기다리네.
○ 서쪽 국경 지금 또다시 오니, 형승(形勝)은 옛 소문 그대로일세. 비휴(豼貅 짐승 이름)는 활을 달[月]같이 당기고, 고각(鼓角)은 진(陣)을 구름처럼 벌였네, 융마(戎馬)는 오랜 해를 수자리 살고, 관하(關河)는 이 경계를 나누었구나. 장군은 당대에 제일 인물이니, 무(武)에 능하고 또한 문(文)에 능하네.” 하였다.
○ 허굉(許硡)의 시에, “관하(關河)가 멀고 먼데 내 마음 어떠한가, 연연(燕然)에 올라가 이름 새기고 싶네. 땅은 압록강에 다했는데 봄물이 넓고, 성은 위화도에 임했는데 저문 구름 평평하네. 연래(年來)로 나라에 몸 바치매 마음만 부질없이 있고, 밤 고요한데 군악기[笳笛] 소리 들리어 꿈이 저절로 깨네. 기둥에 기대어 낮은 소리로 읊조리니 고향에 돌아갈 생각 간절한데, 기우는 달빛 추녀에 이르러 밝게 하네.” 하였다. 의순관(義順館) 옛 이름은 망화루(望華樓)인데, 성의 남쪽으로 2리 되는 압록강 물가에 있으며, 중국 조정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우리 세조 때에 누(樓)를 철거하고 관(館)을 두었다. ○ 이첨의 시에, “평생이 자양(子陽)과 같음을 늘 괴상히 여겼었는데, 중국에 멀리 놀아 관광(觀光)하게 되었네. 동으로 돌아와서 좋은 날에 높은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여러 산이 대지(大地)에 잇닿았네. 구름이 변방 하늘에 일어 넓고 아득한 데로 돌아가고, 꽃은 봄 물결 따라 푸르고 아득한 곳에 들어가서, 무궁한 지난 일은 수습하기 어려워, 새 시(詩)를 읊고는 한소리로 외치네.” 하였다. ○ 정몽주의 시에, “말을 달려 유유히 패강(浿江)에 오니, 배신(陪臣)이 곧 관광을 하고 싶구나. 집 떠나 천 리 멂은 차차 깨닫고, 술을 드니 팔황(八荒)이 좁은 것을 알겠구나. 말갈강(靺鞨江) 물가에는 산 겹겹이요, 요양성(遼陽城) 아래에는 길 망망하네. 밤 깊은 데 역려(逆旅)에서 잠 못 이루는데, 한 곡 어가(漁歌) 소리는 짧고 길구나.” 하였다. ○ 진가유(陳嘉猶)의 시에, “강을 건너 돌아와 다시 강 머리에 쉬는데, 멀리 바라보니 뿌연 숲이 먼 물가에 잇닿았네. 따뜻한 물결 한 강은 압록(鴨綠)이 떴고, 저녁 산 두 기슭에 나청(螺靑)을 맺었네. 버들에 꾀꼬리는 봄이 늦은데 소리 아직 미끈하고, 소나무의 학은 집이 깊어 꿈을 깨지 못하네. 동으로 번경(藩京)까지 가자면 아직 천 리인데, 사모(四牡)노래 들리니 몇 번이나 들을건고. ○ 만 리 하늘가에 먼 손이 지나는데, 붉은 정자 푸른 술[綠酒]에 뜻이 어떠뇨. 부여(扶餘)의 지맥(地脈)은 강에 임해 다했고, 요(遼)의 동쪽 산광(山光)은 물건너 많구나. 절모(節旄)가 경기(京畿)를 가리켜 새벽 말을 재촉하는데, 은혜가 해국(海國)에 미쳐 맑은 물결 넘치네. 서(西)로 가면 귀국하는 길이니 양관곡(陽關曲) 나를 향해 부를 것 없네.” 하였다. ○ 김식의 시에, “바람 향해 말 멈추니 낮 연기 나는데, 오로지 동으로 가는 첫 길을 헤아리네. 깎인 기슭 청산(靑山)에는 솔[松] 머리 합치고, 긴 강 파란 물엔 압두(鴨頭)가 평평하네. 노랫소리 길에 가득하니 사람 모두 기뻐하고, 풀빛이 하늘에 잇닿으니 만물 모두 번영하네. 화순관에 앉았으니 향기가 집에 가득한데, 배신(陪臣)이 술자리 함께 하여 임금 뜻을 전하네. ○ 동번(東藩)의 인물 옛 유자(儒者)라, 왕래가 잦아서 접반(接伴)하여 놀았네. 화순관 맑은 술잔은 나를 더 취하게 하고, 금낭(錦囊)의 좋은 글귀는 누구 위해 머물렀나. 송산(松山)에 비 지나니 남은 더위 사라지고, 압록강에 바람 이니 첫 가을을 알겠네. 진중(珍重)하게 국왕(國王)이 이별한 뒤엔, 자주 태평루(太平樓)에 오르지 말지어다.” 하였다.
○ 장성의 시에, “강 머리의 푸른 풀은 수심 불러일으키는데, 수인(愁人)을 대하여서 나그넷길 헤아리지 마오. 한 자리 좋은 바람은 때 맞춘 비를 보내고, 산중턱의 남은 해는 저녁 구름에 평평하네. 현왕(賢王)이 이미 은근한 뜻을 다하니, 돌아가는 사신이 응당 사뢰(賜賚)의 영광을 전하리. 판서(判書)가 구면 같음이 더욱 기쁘니, 시로 창화(唱和)하매 정을 이기지 못하겠네.” 하였다. ○ 기순의 시에, “공관(公館)에 자리 베푸니 한낮이 기울었고, 소반에 가득한 안주는 진기한 것 늘어놓았네. 술은 녹수(綠水)를 나누어 향기가 항아리에 넘치고, 병풍은 푸른 산을 껴서 그림자가 장막에 떨어지네. 운금(雲錦)을 꾸민 나머지 꽃무늬 찬란하고, 색실로 봉황을 만들었네. 성조(聖朝)의 덕화는 이제 안 닿는 곳 없으니, 풍속이 다른 곳에도 예의 존중함을 기꺼이 보네.” 하였다. ○ 이곡(李穀)의 망화루 시에, “신세(身世)가 한가하여 누각에 들어와 의지했는데, 이 다락이 또한 나라 서쪽 끝에 있구나. 구경을 청하니 여행하는 동안에 세월이 빠른 것을 보게나, 누각 아래 긴 강이 끊임없이 흐르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유의(儒衣)로 몇 번이나 관성(關城)의 아전을 보았던고, 사절(使節)로 거듭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네. 백 척(百尺)이나 되는 강가의 누각은 우뚝하게 높았는데, 낙하고목(落霞孤鶩)이 난간에 닿았네.” 하였다. ○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동으로 돌아와 나라 서쪽의 누각에 올라와 보니, 만 가지 풍경이 잠깐 사이에 와서 이바지하네. 먼 변방에 눈 개니 산이 끝없고, 긴 강에 바람 자니 물이 잠잠히 흐르네.” 하였다. ○ 왕창의 시에, “조칙(詔敕)을 금니(金泥)에 받들고 우리나라를 지나니, 말 앞에 고취(鼓吹)가 정당(旌幢)에 둘러싸였네. 평평한 숲에는 길이 아득히 성곽을 비껴 통했고, 넓은 들엔 하늘이 낮아 강에 반쯤 들어갔네. 꿩을 바쳐 월상(越裳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었던 나라)들은 모두 조공(朝貢)에 힘썼고, 표[表函]를 바친 모든 촉(蜀) 나라는 항복하였었네. 부여(扶餘)는 지척에 요수(遼水)로 분계를 했는데, 예의를 지킨 유래로 풍속 더욱 후하구나.” 하였다. 취승정(聚勝亭) 객관 동쪽에 있다. ○ 홍치(弘治) 갑인년에 목사 구겸(具謙)이 세웠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기문에, “주의 객사 동쪽에 땅이 둥그스름한 데가 비어 있어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덮이고 닭 돼지 개의 더럽히는 바이므로 예전에는 돌아보는 사람이 없더니, 홍치(弘治) 기원 6년에 능산(綾山) 구겸(具謙) 공이 이 고을의 목사가 되어, 비로소 이상히 여겨서 그 덮인 숲을 깎고 그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그 둥근 것을 평평히 하고서, 그 위에 정자를 세우니 날개 편 듯하다. 빈객들이 오르기도 전에 능산이 죽으니, 슬프다. 8년 봄에 지금 목사 황형(黃衡) 공이 이어서 다스리니 마침 변경에 일이 없었으므로 그 백성이 병란 있음을 보지 못하므로, 날마다 오직 손님들의 노는 데만 갖추는 것으로 일삼았다. 황공이 말하기를, ‘객사는 크긴 하지만 답답해서 마음대로 펼 수 없고 통군정은 트이긴 했으나 높아서 늘 오를 수 없으니 이 정자라야겠다.’ 하고, 이에 능산이 마치지 못한 공역을 끝내었으니, 마당이 평평히 넓고 창호(窓戶)가 통창하여, 앉아서 호산(湖山) 몇 십 리의 먼 곳까지 다 구경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이 해에 황제(皇帝)가 태감(太監) 김보(金輔), 태감 이진(李珍), 행인(行人) 왕헌신(王獻臣)을 보내어 우리 성종의 시호(諡號)와 금상(今上)의 고명(誥命)을 내리매, 노공필(盧公弼) 공, 송공일(宋公軼) 공, 김심(金諶) 공이 강 위에서 맞이하여 위로하였는데, 겸선(兼善 홍귀달의 자(字))의 재주 없는 몸으로도 또한 부끄럽게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여기에 다 모였다. 목사가 정자에 술과 안주를 놓고 귀한 손님을 윗자리에 모시었는데, 때마침 날씨가 풀리어 따뜻하고 훈풍(薰風)이 남에서 불어오매, 옷깃을 헤치고 맞으니 상쾌하기가 뜨거운 것을 참았다가 시원한 물에 씻는 듯하다. 목사가 술을 따르며 말하기를, ‘정자가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하니, 노(盧)공이 이르기를, ‘아, 정자는 내가 마땅히 이름 지을 것이다. 대개 동방의 지맥(地脈)이 여기 와서 다하였으니, 그 꿈틀거리고 맑은 기운이 반드시 강의 물가에서 뭉치어 얽혔을 것이다. 중국의 산이 또한 강에 다달아 멈추어서 늘 푸름을 보내 오고 푸름을 옮겨다 주어 통군정의 처마를 둘러쌌다. 통군정은 위로 삼광(三光 해와 달과 별)을 삼키고 옆으로 만상(萬象)을 당겨서 굽어 눌러 통해 쏟았는데, 이 취승정이 다 이어받아서 쌓아 모아 유람하는 사람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니, 어찌 취승이라고 이름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나와 제공(諸公)이 조정에서 뽑혀와서 천자의 큰 명(命)을 맞이하여 여기서 모이고 여기서 잔을 드니 다행이 아니겠소. 취승이라 일러도 또한 어찌 좋지 않겠소.’라고 하매 모두들 좋다고 하고 서로 함께 다시 잔질하매 취해서 눕고 깨서 일어나고 하였다. 그 말을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하였다. ○ 노공필의 시에, “취승정이 높다랗게 변방을 진압하니, 등림하여 구경하매 조그만 것까지 다 뵈네. 긴 강은 아득하여 바다에 잇달았고, 먼 나무는 영롱하게 저녁 햇빛 띠었네. 땅에 가득한 눈꽃[雪花]에 배꽃 반쯤 떨어지고, 하늘에 나부끼는 푸른 물결에 보리는 비로소 살찌네. 노래(老來)에 호산벽(湖山癖 산수를 좋아하는 버릇)이 줄지 않아서, 취해 조각한 난간에 기대니 호탕한 흥이 날리네.” 하였다. ○ 조위의 시에, “웅번(雄藩)이 옛적부터 변방을 장(壯)하게 했는데 화려한 정자 새로 지어 산(山)을 대했네. 절역(絶域)의 구름 안개 취한 눈에 들어오고, 층성(層城)의 꽃과 버들이 맑은 햇빛에 아양떠네. 산은 넓은 들을 에워서 푸르기가 그림 같고, 비가 긴 강을 지나가니 푸름이 점점 살찌네. 올라서 돌이켜 멀리 바라보매 고향 그리는 마음은 밤낮 남쪽으로 날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네.” 하였다.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말발굽이 서해(西海)로 와서 변방에 이르렀는데, 백 척 높은 정자가 자미(紫微 임금의 궁궐)에 가깝구나. 조각한 난간에 의지하여 좋은 경치를 보니 주박(珠箔 주렴(珠簾))으로 하여금 맑은 햇빛을 가리지 말라. 강은 압록(鴨綠)이 비껴서 하늘과 아울러 맑고, 버들에는 누른빛 짙은데 비를 맞아 윤이 나네. 문득 옥당(玉堂 독서당(讀書堂), 호당(湖堂)이라고도 한다.)을 생각하는데 몸은 만 리 밖에 있으니, 봉래산(蓬萊山) 어느 곳에 오색(五色) 구름 나는가.” 하였다.
【학교】 향교 주성(州城) 안의 서쪽에 있다. 역학(譯學) 주의 서쪽에 있다.
【역원】 의순역(義順驛) 곧 의순관이다. 소곶역(所串驛) 주의 남쪽 33리에 있다. 방산역(方山驛) 방산진에 있다. 고진강원(古津江院) 고진강 물가에 있다. 개무원(蓋武院) 주의 동남 51리에 있다.
【창고】 군창(軍倉) 객관 북쪽에 있다. ○ 본도의 철산(鐵山)ㆍ곽산(郭山)ㆍ정주(定州)ㆍ선천(宣川)ㆍ용천(龍川) 등의 관조세(官租稅)를 모두 여기에 수납한다.『신증』 소곶창(所串倉) 홍치(弘治) 경신년에 경변사(警邊使) 이극균(李克均)이 설치하였는데, 정녕창(定寧倉)의 미곡을 옮겨서 채웠다.
【불우】 미륵사(彌勒寺)ㆍ금강사(金剛寺) 모두 송산에 있다. 관음굴(觀音窟)ㆍ보라사(寶羅寺) 모두 마두산에 있다. 불장사(佛藏寺) 천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성안 북쪽에 있다. 압록강사(鴨綠江祠) 구룡연 위에 있다. 《사전(祀典)》에 장단(長湍)의 덕진(德津)과 평양강(平壤江)과 더불어 서쪽 지방의 큰 강이 되어 중사(中祀 중간 정도의 제사를 지내는 것)에 실렸고,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서 제사 지낸다. 여단(厲壇) 주의 북쪽에 있다.
【고적】 국내성(國內城)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교외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임금이 장생(掌牲) 설지(薜支)에게 명하여 쫓게 하니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잡아서 국내의 인가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臣)이 돼지를 쫓아 국내에 이르러서 그 산수(山水)를 보니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五穀)에 알맞고 또한 미록(麋鹿) 어별(魚鼈)의 자산(資産)이 많습니다. 서울을 옮긴다면 백성에게 이로움이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지세(地勢)를 보고, 22년 겨울에 임금이 국내에 서울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고서 4백 25년을 지냈으며, 장수왕이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 지금 상고하건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인주(麟州)에 장성(長城) 터가 있는데, 덕종 때에 유소(柳韶)가 쌓은 것이며, 주(州)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였고, 또 병지(兵志)에,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국내성은 마땅히 옛 인주의 지경 안에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지(高句麗志)에는 이르기를, “국내성이 꼭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땅히 압록강 이북의 한(漢)의 현도군(玄菟郡) 경계, 요(遼)의 동경(東京)인 요양(遼陽)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분명하지 않으나, 임시로 정의 설을 좇아 여기에 붙인다. 고정주(古靜州)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의 송산현이었는데, 덕종 2년에 성을 쌓고 정주진(靜州鎭)이라 하고서 백성 1천 호(戶)를 옮겨서 채웠고, 문종 31년에 또 내지(內地)의 백성 백 호를 옮겼다. 성의 둘레는 1만 2천 6백 10척이었으며, 본조 태종 2년에 주를 폐하고 의주에 내속(來屬)시켰으며, 세종 때에 또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7백 70척이고 안에는 5개의 우물이 있다. 고인주(古麟州) 주의 남쪽 35리다. 본래는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이었는데, 현종 9년에 인주 방어사(麟州防禦使) 고을로 일컫고, 21년에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속칭 조여(鳥餘)라 하며 둘레가 1만 1천 1백 척이며, 영평진(永平鎭)의 백성을 옮겨서 채웠다. 고종 8년에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 함인(含仁)이라고 일컬었다가 뒤에 지군사(知郡事) 고을로 고쳤으며 본조에서 주를 폐하여 내속시켰고, 세종 때에 인산진을 두었다. 고영주(古靈州) 주의 남쪽 5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의 흥화진(興化鎭)이었는데, 현종 23년에 영주로 승격시켜서 방어사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주를 폐하여 내속시켰다. 토성 터가 있는데, 둘레가 2천 5백 80척이다. ○ 고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강조(康兆)를 토벌하려고 흥화진을 에워싸매 양규(楊規)가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호부 낭중(戶部郎中) 정성(鄭城), 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主簿) 이수화(李秀和), 판관(判官) 늠희령(廩羲令) 장경(張顥)과 더불어 성에 틀어박혀 굳게 지켰는데, 거란 임금이 거짓으로 강조의 글을 써서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거늘 양규가 이르기를, “나는 왕명(王命)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지 않았다.” 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뒤에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내침(來侵)하매 강감찬(姜邯贊)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를 삼고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으로 부장(副將)을 삼았다. 군사 20만 8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고, 흥화진에 가서 선기병(選騎兵) 1만 2천 명을 산골짜기 가운데에 매복시키고,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서 성의 동쪽에 있는 큰 강을 막고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것을 트고 복병을 일으켜서 크게 패배시켰다. 고정녕현(古定寧縣) 주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아조(我朝) 태종 5년에 비로소 현령(縣令)을 두었고, 세종 27년에 방산으로 옮기고 높여서 군(郡)으로 하였고, 세조 원년에 옛 읍(邑)으로 환원하였다가 2년에 현을 폐하고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고위원진(古威遠鎭)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고려 현종 20년에 유소를 보내어 옛 석성을 수리하고 위원진을 두니 흥화진의 서북쪽에 있는데, 성의 둘레가 4천 8백 40척이고, 안에는 7개의 우물이 있다. 고영덕진(古寧德鎭) 주의 동남쪽 40리다. 고려 현종 21년에 토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천 12척이고 안에는 12개의 우물이 있다. 문종이 거란 흥종의 휘(諱)를 피해 영덕성(寧德城)이라고 개칭하니, 진(鎭) 자가 진(眞 거란 흥종의 휘)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본조에서는 정녕현(定寧縣)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현을 없애고 내속시켰다. ○ 고려 고종 4년에 금(金)의 내원성(來遠城)이 이첩(移牒)하여 이르기를, “반적(叛賊) 만노(萬奴)가 본래 거란과 한 마음이라 만약 군사를 아울러 귀국(貴國)을 내침한다면 그 걱정이 적지 않으며, 또한 귀국에게 격퇴당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달아나 돌아올 것이니, 실지로 귀국을 침범하거든 꼭 급히 알려 주시면 우리가 곧 출군(出軍) 엄호(掩護)하여 공격하겠습니다.” 하니, 영덕성이 회첩(回牒)하여 이르기를,“거란병이 일찍이 우리나라 지경에 들어왔다가 여러 번 좌절되었는데, 만약 만노가 이어서 이른다면 우리 군력(軍力)이 나뉠까 두렵고, 거란의 구적(寇賊)이 다시 세력을 떨치어 상국(上國)을 침범한다면 일이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라 알리기에 미칠 수 없을 것이니, 청하건대 미리 병마를 베풀어서 만노를 막아 우리 읍에 이르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 읍이 또한 거란병을 막는다면 상국에 이르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다.” 하였다. 고영삭진(古寧朔鎭) 주의 동쪽 1백 20리에 있다. 고려 문종이 안의진(安義鎭)의 진자농장(榛子農場)에 성을 쌓고 영삭진이라 하여 변방 적의 요충(要衝)을 진압하였다. 성의 둘레가 7천 7백 60척이었는데, 지금은 토성의 남긴 자리만 있으며,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고정융진(古定戎鎭) 주의 동쪽 80리에 있다. 유소가 또한 흥화진 북쪽에 있는 옛 석벽(石壁)을 수리하여 정융진을 두고 영평성(永平城)의 백성을 옮겨서 채웠으며, 토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천 7백 92척이고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으며, 속칭 임천성(臨川城)이다. 고연평성(古延平城) 주의 동남쪽 8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8백 87척이고,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고연주성(古延州城) 주의 동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80척이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옥강성(玉江城) 옥강의 동쪽 기슭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20척이고, 사면이 절벽인 가운데에 못이 있다. 전문령고성(箭門嶺古城) 주의 동남쪽 2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1천 6백 10척이고, 안에는 62개의 우물이 있다. 가미성(嘉彌城) 주의 북쪽 1백 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백 척이고, 우물이나 샘이 없다. 장성(長城) 고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창설하였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다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연무(延袤 연은 동서, 무는 남북, 즉 넓이, 넓음, 길게 뻗음의 뜻)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25척씩이며, 속칭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한다. 주의 동쪽 옥강리(玉江里)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3백 2보(步)이고, 구룡연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4백 11보이다. 고동보(庫洞堡)ㆍ삼기보(三岐堡) 주의 북쪽에 있다. 검동보(黔同堡) 곧 검동도이다. 암림보(暗林堡)ㆍ미륵당보(彌勒堂堡) 주의 서남쪽 40리에 있다.
【명환】 고려 김인존(金仁存) 용만(龍灣)에 출진(出鎭)하였는데, 그 제자들이 서울 성문 밖에서 전송하매 김인존이 시를 지어주어 이르기를, “10년 동안 대각(臺閣)에서 사륜(絲綸 임금의 말)을 맡았었는데, 오늘 갑자기 바뀌어 변방의 신(臣)이 되네. 간액(諫掖)으론 당의(讜議)를 아뢰기를 잘하지 못하였으나, 변성(邊城)에선 그런 대로 오랑캐의 병란을 없애보려네. 귀밑머리 일찍 나라 잃은 근심 때문이고, 눈물을 금하기 어려움은 어버이 그리워서일세. 일문(一門)의 어진 제자 매우 감사하니, 많은 술병의 맑은 술로 가는 사람을 전송해 주네.” 하였다. 김경손(金慶孫) 고종 때에 정주 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침입하여 정주(靜州)까지 오매 김경손이 영아(營衙) 안의 감사사(敢死士) 12명을 이끌고 문을 열고 나아가 힘껏 싸우니 몽고가 물러가 달아났다. 뒤에 다시 와서 공격하매 크게 싸우기 20여 일에 김경손이 기회에 맞추어 설비하고 귀신같이 응변(應變)하니 몽고가 이르기를, “이 성이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대적하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으며, 곧 대장군(大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벼슬을 받았다. 김극기(金克己) 일찍이 용만의 좌장(佐將 진영의 부사령관)을 지냈는데, 시가 있어 이르기를, “문장(文章)은 늙어가며 서로 즐길 만하여 한 검(劍)으로 노는 곁에 오히려 오거(五車 다섯 수레에 실은 많은 책)일세. 관아 일이 파하면 새리(塞吏 변방의 관리)인 것을 잊고, 지창(紙窓)이 밝은 곳에 누워 책을 보네.” 하였다.본조 이사검(李思儉)ㆍ이인(李茵)ㆍ유익명(兪益明) 모두 목사였다.
【인물】 고구려 을파소(乙巴素) 고국천왕 때에 4부(部)가 함께 동리(東里)의 안류(晏留)를 추천하니, 임금이 국정(國政)을 맡기는데, 안류가 사양하여 이르기를, “미신(微臣)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대정(大政)에 참여할 만하지 못합니다. 서압록곡(西鴨綠谷)의 좌물촌(左勿村)에 을파소란 사람이 있는데,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지혜로운 생각이 깊으니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후한 예(禮)로 맞이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 벼슬을 제배하고 곧 국상(國相)을 삼았는데, 을파소가 정치와 교육에 밝고 상벌을 신중히 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으며, 그가 죽자 국민이 통곡하였다. 밀우(密友)ㆍ유유(紐由) 동천왕 때에 위(魏) 나라의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와서 환도성(丸都城 당시의 서울)을 함락시키매, 임금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려고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병졸들이 모두 흩어지고 밀우만이 임금 곁에 있어 사사(死士)를 모집하여 함께 나아가 적을 맞아 힘껏 싸우니, 임금이 겨우 벗어날 수 있어 몰래 가서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의 군사가 쫓기를 그만두지 않으매, 동부(東部) 사람인 유유가 임금 앞에 나아가 이르기를, “사세가 매우 위급하나 부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臣)이 청하건대 가서 위군을 막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식기(食器)에 칼을 감추고, 앞에 나아가 칼로 위의 장수를 찌르고 더불어 함께 죽으니, 위군이 드디어 문란해져, 임금이 군사를 이끌고 세 길로 쫓았다. 임금이 나라로 돌아와서 공을 논하는데, 밀우와 유유를 첫째로 삼았다. 명림답부(明臨答夫) 신대왕 때에 국상이 되었다. 한(漢) 나라의 현도군 태수(玄菟郡太守) 경림(耿臨)이 군사를 일으켜 와서 공격하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이로운가를 물으니, 명림답부가 이르기를, “지금 한 나라 사람은 천 리나 식량을 옮겨오니 길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깊이 도랑을 파고 방벽을 높이 하고 기다리면 저들이 열흘이 못 가서 굶주리는 어려움 때문에 돌아갈 것이니 그때 우리 편이 굳센 군사들로 쫓으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 말을 따랐다. 한 나라 사람들이 과연 견디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어 돌아가거늘 명림답부가 쫓아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우니 한군(漢軍)이 크게 패하였으므로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였다. ○ 이상의 세 사람은 모두 국내에 도읍하였을 때의 일이므로 여기에 붙인다.
고려 정오보(丁五甫) 임연(林衍)이 왕위를 폐하고 세우기를 마음대로 할 때, 세자(世子)가 동쪽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보내어 압록강에서 기다렸다가 위협하려고 하였다. 정오보가 밤에 강을 건너가서 변을 고하니,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서 천자에게 알렸다. 황제가 임금에게 복위(復位)하고 입조(入朝)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매, 임연이 등창이 나서 죽었다. 조문발(趙文拔) 정융진 사람인데, 어려서 총명하고 민첩하여 글을 읽으면 바로 쓰고, 글이 깨끗하고 놀라웠다.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번 전직하여 중서주서(中書注書)가 되었는데, 일찍이 성중(省中)에서 순직할 때 한 하리(下吏)가 매우 추워하매 조문발이 가엾게 여겨 이불 안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였더니 그가 가볍게 여겨 배 위에 발을 올려 놓았다. 그 밤에 마침 정령(政令 인사명령 등속)을 펴게 되어 성리(省吏)가 와서 주서가 정언(正言)이 되었음을 알리니, 하리소서가 가만히 그 발을 거두는데도 조문발이 오히려 깊이 잠든 척하였다. 벼슬은 예부 낭중(禮部郎中)에 이르렀다.
본조 장사길(張思吉) 본주의 토호(土豪)인 장씨(張氏)들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매 국가의 정령이 미칠 수 없었는데, 장사길이 우리 태조의 지휘 아래에 예속하기를 원한 뒤로부터는 다시 배반하지 않았다. 뒤에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어 벼슬이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이르고 희양(僖襄)이라 시호하였다.
『신증』 【유우】 본조 (曹偉).
『신증』 【열녀】 본조 벌등이(伐等伊) 백성 조개동(趙開同)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범에게 물려가게 되매, 벌등이가 크게 소리지르며 범을 치니, 범이 버리고 가서 지아비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임금께 들리어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용만성 밖에 다시 고을이 없다. 김극기의 시에, “집을 떠나 탄식 버리고 봄놀이도 저버리고 필마(匹馬)로 서쪽에 오니 벌써 철 바뀌어 가을일세. 나그넷길 몇 리냐고 묻지 마오, 용만성 밖에는 다시 더 고을 없네.” 하였다. 하늘이 학야(鶴野) 바람 쓸쓸한 데에 낮다.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주가(周家)에는 우는 봉(鳳)이 조양(朝陽 산의 동쪽)에 모이니, 옥백(玉帛)은 여러 지방에서 임금의 덕업을 뵈러 왔네. 크고 넓은 황령(皇靈 임금의 신령)은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빛나는 사절(使節)이 하황(遐荒 개화되지 않은 먼 곳)까지 왔네. 하늘은 학야 바람 쓸쓸한 데에 닿았고, 땅은 용만 길이 아득한 데에 다했네. 나라를 떠나 몸이 차차 늙어감을 잊고, 앉아서 딱따기 소리 들으니 자정(子正)이 길구나.” 하였다. 옛 보루 풀 깊은 곳에 전사(戰士)의 유골을 묻다. 권근(權近)이 천자의 명을 받고 지은 시에, “강 위의 외로운 성(城)은 땅이 자연히 치우치니, 상마(桑麻) 있는 거리는 정말 쓸쓸하구나. 봉강(封疆)은 오히려 장군의 지략에 의지하고, 보장(堡障)은 반드시 자사(刺史)의 현명을 믿어야겠네. 옛 보루 풀 많은 곳엔 전골을 묻었고, 거친 마을 나무 늙은 곳엔 밥짓는 연기를 띠었네. 이제 천자의 덕화가 동쪽으로 퍼져오는 날을 만났으니, 백성이 편히 잠들 수 있음이 매우 기쁘구나.” 하였다. 고국(古國)에는 산하(山河)가 장(狀)하다 안노생(安魯生)의 시에, “왕명을 받들어 천자를 뵙고 수레 돌려 오는데 아직 젊었네. 10년 동안 강해(江海)에 뜻을 뒀는데, 만 리의 나그넷길 근심이로세. 고국의 산과 물이 씩씩도 한데, 황성(荒城)에는 세월이 한가히 가네. 스스로 세속을 달리하기 좋아하여, 종일토록 혼자서 다락[樓]에 있네.” 하였다. 산길은 구름 속으로 잇달아 뚫려 있다 예겸의 시에, “아주 밝아 의순(義順)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가서 왕도(王都)로 들어가는데, 산길은 구름 속으로 뚫려 있고, 송교(松橋)는 잎을 띤 채 깔려 있네. 이 한 길엔 요참(腰站 주막)이 자주 있는데, 몇 곳에나 들마을이 외롭겠느뇨. 말 머리에 주리자(侏離子)는 말[音]이 달라 불러도 대답이 없네.” 하였다. 하늘이 웅장한 국경을 베풀매, 묻노라, 몇 봄이 지났느뇨 강희맹의 시에, “하늘이 웅관(雄關)을 베풀어서 몇 해이더냐. 땅은 문호(門戶) 맞춤이니 늘 손님을 맞네. 용맹스러운 백대(百隊)에는 구름같이 주둔한 군사요, 연기 나는 천가(千家)엔 모여 먹고 사는 백성일세. 강세(江勢)는 성 북쪽 기슭에 사랑스레 들어왔고, 산형(山形)은 바다 동쪽 물가에 치우쳐 모였네. 등림하니 화이(華夷)의 경계를 가리지 못하겠고, 만고의 기주(箕疇 기자(箕子)의 홍범구)에는 스스로 신(神)이 있네.” 하였다. 옥(玉) 술병에 때때로 단지 속의 술을 떠서 보내다. 앞사람의 시에, “옥호(玉壺)에 때때로 단지 속의 술을 보내서 관(館) 열고 음식 벌여 멀리 온 손 위로하네. 늘 행장에 익숙하니 역마(驛馬)를 번거롭히고, 얼굴을 자주 보니 변민(邊民)을 알겠네. 노란 꾀꼬리 푸른 나무는 교로(橋路)를 짧게 하고, 보랏빛 제비 경쾌한 바람은 넓은 물가를 맑히네. 귀양살이 나그네가 어찌 시력(詩力) 주는 것을 알랴, 해마다 광경이 억지로 정신을 전하네.” 하였다. 8영(八詠) 〈임사홍의 시.〉 압수(鴨水)의 춘파(春波) 일대(一帶)의 긴 강은 만고에 흘러, 용용(溶溶 물이 성(盛)한 모양) 양양(漾漾 물이 자연스레 흐르는 모양)하기 어느 때나 그칠까. 봄이 오니 새 물 가득히 포도같이 푸르고, 넘치는 맑은 빛은 갈매기를 물들일 만하구나. 골령(鶻嶺)의 모운(暮雲) 호산(胡山)은 벼랑지어 하늘과 나란하고, 야색(野色)은 창망(滄茫)하여 조망(眺望)에 들어 희미하네. 절정에 서린 구름 늘 짙은데, 석양이 밝은 곳엔 새가 날아 내리네. 송산(松山)의 욱일(旭日) 구리징 같은 해가 나무 머리에 걸린 것을 잠깐 보았는데, 붉은빛이 잠시 사이에 강루(江樓)에 스며드네. 변성(邊城)의 초가집 다소를 알겠으나, 자배(炙背)하는 누가 임금에게 드리겠나. 해문(海門)의 비우(飛雨) 흑풍(黑風 큰 바람)이 바다에 불어 하늘이 어둡더니, 용(龍)이 싸워 구름이 다투어 먼 마을이 안 보이네. 귀양 온 나그네가 어찌 수심을 금할 수 있으랴, 초가 처마에서 종일토록 빗물이 동이 뒤집는 것만 보네. 용연(龍淵)의 취벽(翠壁) 독룡(毒龍)이 잠긴 곳에 물이 치우치게 깊으니 깎인 벼랑 높아서 오똑하기 몇 길인지. 낚시꾼만이 때때로 낚시 드리우는데, 편주(扁舟)는 오히려 단풍 진 숲에 매여 있네. 조도(鳥島)의 황로(黃蘆) 북녘 들이 멀리 아득한 데에 들었고, 갓이 끝없는 곳에 이슬이 서리 됐네. 서풍 부는 하룻밤에 꽃이 눈같이 날리니, 봄 하늘에 버들개지 광란하는 듯하구나. 요교(凹橋)의 조객(祖客 손님을 전송함) 풀이 먼 긴 둑에 비가 잠깐 개니, 계교(溪橋)의 저무는 해에 각별히 수심이 일어나네. 가련하다, 목메는 다리 앞의 물은 무정한 것이 유정한 것인 줄을 알겠구나. 평원(平原)의 엽기(獵騎) 들을 불태우니 빈 들에 다했는데, 용맹스러운 병사 천기(千騎)가 정모(旌旄)를 둘러쌌네. 장군이 교렵(校獵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사냥하는 것)하고 늦게 돌아오는데, 고각(鼓角) 소리 가운데에 초승달이 높다랗구나.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25년 왜란을 피하여 여기서 임금이 어가를 세워 머물렀으며, 26년 환도(還都)하여 부윤(府尹)으로 승격하였고, 인조(仁祖) 12년 청북 방어사(淸北防禦使)를 겸하였다가 병자란(丙子亂) 후 혁파한 뒤에 19년 양서운향사(兩西運餉使)를 겸하였다.
【방면】 천내방(川內坊) 부(府)와의 거리가 사방 1천 20리이다. 수진방(水鎭坊) 동쪽으로 40리이다. 소관방(所串坊) 동쪽으로 60리이다. 가산방(加山坊) 위와 같다. 고영삭방(古寧朔坊) 동쪽으로 80리이다. 청수방(靑水坊) 동쪽으로 1백 리이다. 옥상방(玉尙坊) 동쪽으로 1백 20리이다. 위원방(威遠坊) 남쪽으로 50리이다. 광화방(光化坊) 남쪽으로 60리이다. 비현방(批峴坊) 동남쪽으로 70리이다. 월화방(月化坊) 남쪽으로 85리이다. 송장방(松長坊) 동남쪽으로 20리이다. 고군방(古郡坊) 동남쪽으로 40리이다. 관리방(館里坊) 위와 같다. 고성방(古城坊) 동남쪽으로 30리이다. 양상방(楊上坊) 서남쪽으로 65리이다. 고읍방(古邑坊) 서남쪽으로 50리이다. 광성방(光城坊) 위와 같다. 진리방(津里坊) 서남쪽으로 40리이다. 양하방(楊下坊) 서남쪽으로 45리이다. 미라산방(彌羅山坊) 서남쪽으로 9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성안 동쪽에 있다. 서창(西倉) 성안 서쪽에 있다. 군향고(軍餉庫)ㆍ군기고(軍器庫)ㆍ관향고(管餉庫) 인조(仁祖) 원년에 사행(使行)의 노자(路資)와 칙행(勅行)의 책응(策應)에 수용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이상은 모두 성안에 있다. 소관창(所串倉) 소관(所串)에 있는데 연산주(燕山主) 6년 경변사(警邊使) 이극균(李克均)이 설치하였다. 광평창(廣坪倉) 동쪽으로 1백 10리이다. 옥상창(玉尙倉) 동쪽으로 1백 리이다. 고영삭창(古寧朔倉) 동쪽으로 80리이다. 원창(院倉) 동쪽으로 60리이다. 양둔창(楊屯倉) 양하(楊下)에 있다. 해둔창(海屯倉) 인산진(麟山鎭) 남쪽에 있다. 고읍창(古邑倉) 고읍방(古邑坊)에 있다. 가산창(加山倉) 가산방(加山坊)에 있다. 월화창(月化倉) 월화방(月化坊)에 있다.
【진보】 청성진(淸城鎭) 동북쪽으로 80리이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인, 군총(軍摠) 3백 60인, 진창(鎭倉) 1, 곡(穀)이 모두 77석(石)이다. 건천보(乾川堡) 동북쪽으로 20리이며, 권관(權管)이 1인, 군총이 1백 44인, 창(倉)이 1인, 곡총(穀摠)이 8석이다. 양하진(楊下鎭) 서남쪽으로 60리이며, 숙종(肅宗) 4년에 설치하였다. 순조(純祖) 때 폐지하였다.
【영아】 방어영(防禦營) 청성(淸城)ㆍ청수(淸水)ㆍ방산(方山)ㆍ옥강(玉江)ㆍ수구(水口)ㆍ양하(楊下)ㆍ건천(乾川)을 진보(鎭堡)하는데 속하였다. 별무사(別武士) 3백 30인, 장무대병(壯武隊兵) 2초(哨), 정초동오(精抄東伍) 22초, 아병(牙兵) 2초, 별포수(別砲手) 2초, 창군(搶軍) 1초, 작대군(作隊軍) 5초, 표하군(標下軍) 3백 52, 초고(哨考)가 있다.
【토산】 소금[鹽].
【장시】 중강개시(中江開市) 본조(本朝) 세종(世宗) 때 명 나라 선종(宣宗)이 칙령(勅令)으로 경우(耕牛) 1만 마리를 요동(遼東)에 보내어 건포를 무역하였다. 선조(宣朝) 26년 유성룡(柳成龍)의 청으로 요동에 통첩해서 압록 중강(鴨綠中江)에다 개시(開市)하여 무역을 통하고 이내 장시(場市)를 설치하였다. 34년 파하였다가 다음해 다시 영을 내려 의주(義州)에다 옛날과 같이 매매(賣買)하게 하였다. 광해주(光海主) 원년에 파하였고, 인조(仁祖) 24년 다시 설치하여 1년에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로 정하여 교역하게 하였으며, 뒤에 2월과 8월로 고쳤다. 공무역 이외에 만상(灣上)과 송도(松都)의 사상(私商)이 점점 범람하여 수시로 매매하는 자를 중강후시(中江後市)라고 이름하였다. 숙종(肅宗) 26년 파하였으며, 또 사행(使行)에서 책문(柵門)을 출입할 때와 만인(灣人)ㆍ송인(松人) 등이 몰래 은(銀)을 가지고 인부와 말 가운데 섞여 있어 물건을 판매하여 이익을 도모하였다. 모리하는 것이 처음에는 점점 번성하더니 끝에는 연경(燕京)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 성책(城柵)에 나가게 하고, 탄압한 바가 없었다. 그런 연후에 자기 마음대로 매매하여 이름을 책문후시(柵門後市)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사행 회책(回柵) 때에 연화(燕貨)와 동시에 책(柵)에 나오게 하는 것으로 길이 정식을 삼았다. 개시(開市) 공무역 총수(總數) 소 2백 마리, 해대(海帶) 일명 다시마[塔士麻] 1만 5천 7백 95근(斤), 해삼(海蔘) 2천 2백 근, 면포(綿布) 3백 73필(疋), 마포(麻布) 1백 75필 8천 4백 권(卷), 장지(壯紙) 6백 권, 소금 3백 10석(石), 쟁기[犁] 1백 94통(筒), 사기(沙器) 3백 30죽(竹)이다.
【성지】 백마산성(白馬山城) 고려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이 축조하였다. 본조 인조(仁祖) 24년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이 개축하였으며, 성 서남쪽 음저(陰阻) 둘레가 2천 6백 보(步)이고, 높이가 2길이며, 옹성(甕城)이 7, 치각(雉閣)이 7, 문(門) 5, 군금(軍錦) 30, 우물이 32, 못 13이고, 동창(東倉)ㆍ읍창(邑倉)ㆍ양무고(養武庫)ㆍ차승정(次勝亭)이 있다. 외성(外城)은 영종(英宗) 29년 부윤(府尹) 남태기(南泰耆)가 석성을 축조하였는데, 동ㆍ서ㆍ북 3면이 낮고 평평하고, 둘레가 2천 1백 3보(步)이며, 높이가 2길, 치각(雉閣)이 4, 문(門) 3, 제대(梯臺) 2, 군포(軍鋪) 10, 우물 3이다.
【진도】 압록강진(鴨綠江津) 고려 현종(顯宗) 13년 비로소 설치하였고, 압록강 구당(句當)을 설치하였으며, 본조에서는 고쳐 도승(渡丞)으로 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으며, 옛날부터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대로(大路)로 삼았다.
【누정】 세병루(洗兵樓)ㆍ환학정(喚鶴亭).
【사원】 현충사(顯忠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있다. 숙종(肅宗) 경인년에 세웠으며, 정종(正宗) 기유년에 사약(賜額)하였다. 강감찬(姜邯贊) 마전(麻田)을 보라. 임경업(林慶業) 충주(忠州)를 보라. 황일호(黃一皓) 강화(江華)를 보라. 최효일(崔孝一) 의주(義州) 사람이며, 병판(兵判)으로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안극성(安克誠) 용천(龍川) 사람이며, 병판으로 증직되었다. 차예량(車禮亮) 의주 사람이며 병판으로 증직되었다. 차충량(車忠亮) 차예량의 형이며, 병판으로 증직되었다. 차원철(車元轍) 차예량의 종제(從弟)이며 병판으로 증직되었다. 차맹윤(車孟胤) 병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장후건(張厚鍵) 본관은 안동이고, 병의(兵議)로 증직되었다. 별단(別壇) 정종(正宗) 무인년 승지(承旨) 심진현(沈晉賢)의 말에 따라 현충사 옆에 설치하여 별단에서 제사 지냈다. 명(明) 나라 유민(遺民) 임인관(林寅觀) 등 95명이다. 본조(本朝) 의사(義士) 백대호(白大豪) 등 21명이다. 기충사(紀忠祠) 성안에 있으며, 경종(景宗) 임인년에 세웠고, 정종(正宗)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을파소(乙巴素)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때 처사이며, 압록강(鴨綠江) 가에 살았고, 국상(國相)으로 초빙되었다. 김상헌(金尙憲) 태묘(太廟)를 보라.
ⓒ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국 (역) | 1970
義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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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至朔州府界一百十六里,至龜城府界八十二里。南至龍川郡界六十里,至同郡界良策館六十六里,至鐵山郡界七十九里。西至鴨綠江十四里。北至同江二里。距京都一千一百八十六里。
建置沿革
本高麗龍灣縣。又名和義。初,契丹置城于鴨綠江東岸,稱保州。文宗朝,契丹又設弓口門,稱抱州。一云把州。睿宗十二年,遼刺史常孝孫與都統耶律寧等v002_391b避金兵,泛海而遁,移文于我寧德城,以來遠城及抱州歸我。我兵入其城,收拾兵仗錢穀。王悅,改爲義州防禦使,刷南界人戶以實之。於是復以鴨綠江爲界,置關防。仁宗四年,金亦以州歸之。高宗八年,以叛逆降稱咸新,尋復古。恭愍王十五年陞爲牧。十八年,置萬戶府,設左精、右精、忠信、義勇四軍,各差上、副千戶v002_391c管之。本朝太宗二年,始置判官,以靜州及威遠鎭來屬。世祖朝置鎭。
鎭管 郡二。鐵山,龍川。
官員 牧使,判官,敎授。各一人。
土官 都轄司 都轄,典事。各一人。
典禮署 勘簿,給事,攝事。各一人。
戎器署 司倉署 掌事,攝事。各一人。
典酒局 給事,攝事。各一人。
司獄局 攝事。一人。
鎭v002_391d江衛 勵果,副勵果,勵正,副勵正。各一人。
勵猛。二人。
副勵猛。三人。
勵勇。四人。
副勵勇。五人。○土官以下,與咸鏡道慶源府同。
郡名
龍灣,和義,保州,抱州,把州,咸新,松山。
姓氏
本州 張。安東,化寧。崔。江陵。獨孤。
靜州 尹。平山。金。平山,延安,金海。趙。忠州。
麟山 李,柳。竝密城。徐。忠州。崔。海州。
靈州 金。龍岡。
威遠 白。白州。任,柳,盧。竝豐州。徐。光陽。
定戎 趙。v002_392a金。安岳。任。忠州。李。安東,瓮津。高。三和。
寧德 金。殷栗。林。丘縣。楊。唐嶽。
寧朔 金,康。竝長淵。吳。海州。
風俗
風氣强勁,善射御,好畋獵。地志。
形勝
鴨江天塹。《大明一統志》。
樂浪分疆。祁順詩。
山川
松山。在州東三十里。鎭山。
彌羅山。在州南一百里。本龍川郡地,成化十二年割屬于州。魚箭二處:一在龍川郡獅子島南,一在島北。鹽盆二所。
白馬山。在州南三十里。諺傳白龍馬出遊,故名。
馬頭山。在州南八十里。
華嚴山,天磨山。俱在古定寧北。距州一百五十里。天磨山又見朔州。
板幕峴。在州東北百十六里。
v002_392b加豆等峴。在州東五十里。
鎭兵串。在州南五十里。
海。在州南。
九龍淵。在州北八里。淵南有土城基。周六百尺。諺傳哈丹、指丹兄弟,一居淵上土城,一居州城內。靜州戶長金裕幹欲以計逐之,詐言:“我國於某夜欲殲爾等。” 至其夜,於山上多設炬火以示之。哈丹等以爲信然,遂擧城渡江而逃。然江上無所渡舟楫,裕幹心異之,諦視之,於江北近邊,沈鐵牛立之,又以鐵鎖着南岸巖石間,連亘於牛背,作浮橋以渡矣。裕幹卽令破橋,俾不復渡。永樂戊子築州城時,令善泅者取鎖鐵,爲城門鎖鑰,其鐵牛則淪沒淵沙,無復尋矣。○金克己詩:“神龍似眞人,變化安可測?上天下天一瞬間,人道宅此蒼山側。溶溶綠水幾百尋?玉鑑不受塵埃侵。神物中藏定可信,有時白氣生潭心。靈壇枕水誰始築?鼓舞祈禳久成俗。恨無騷人作《九歌》,波底只見魚鱗屋。”
鴨綠江。在州西北。一云馬訾,v002_392c一云靑河,一云龍彎。西距遼東都司五百六十里。其源出胡地白頭山,南流數百里,經咸鏡道甲山、三水,過本道閭延、茂昌、虞芮、慈城,至江界、渭源地境,與禿魯江合;至理山郡山羊會,與蒲洲江【源出建州衛。】合;至阿耳堡,與童巾江合。經碧潼、昌城、小朔州,至州北於赤島東分三派:一南流匯爲九龍淵,名曰“鴨綠江”,水色似鴨頭,故名之;一西流爲西江;一從中流,名曰“小西江”。至黔同島,復合爲一,至水靑梁,又分二派:一西流,與狄江【在鴨綠江西北。】合;一南流爲大江,繞威化島,至暗林串。西流至彌勒堂,復與狄江合爲大摠江,入于西海。朱子曰:“女眞起處有鴨綠江。傳云‘天下有三處大水:曰黃河,曰長江,曰鴨綠’是也。” ○《宋史》:“高麗恃鴨綠江以爲固。江廣三百步,其東所臨,海水淸澈,下視十丈,東南望明州,水皆碧。” ○大明高皇帝詩:“鴨綠江淸界古封,强無詐息樂時雍。逋逃不納千年祚,禮義咸修百世功。漢伐可稽明載冊,遼征須考v002_392d照遺蹤。情懷造到天心處,水勢無波戍不攻。” ○大明僧圓庵應制詩:“寒江一派水溶溶,鴨綠微茫颺晩風。源出白山來縹緲,勢分滄海接鴻濛。分流畎畝民情悅,利涉舟航客路通。聖主恩波隨處洽,普天率土入提封。” ○權近應制詩:“塞邑蕭條樹老蒼,長江一帶隔遼陽。皇風不限華夷界,地理何分彼此疆?任見波濤掀小艇,欣瞻天日照遐荒。誰知此去悤悤意?願奉恩綸報我王。” ○“國有封疆險,天分地利雄。三江深不測,一道浩難通。水闊波連海,風生浪接空。小舠如箭疾,利涉謝篙工。” ○大明僧溥洽詩:“鴨綠秋波徹底淸,滔滔不盡古今情。降幡終見來平壤,受幘徒聞築小城。曉渡發船霜氣白,晴川飮馬雪花明。誰言此水爲天塹?鯨海無邊亦已平。” ○鄭夢周詩:“義州國門戶,自古重關防。長城何年起?屈曲隨山岡。浩浩靺鞨水,西來限封疆。我行已千里,到此仍彷徨。明朝過江去,鶴野天茫茫。” ○李崇仁詩:“行行恰到鴨江濆,物色v002_393a依然是古園。怪底相逢皆刮目,新詩太半帶華言。” ○李詹詩:“奉節朝天去,貪程夜渡氷。臨深懷戰戰,履薄聽登登。使範知難盡,君恩報未能。貂裘行欲弊,來日又晨興。” ○李穡詩:“薰風吹客路,落日照鄕關。小雨波聲急,平坡草色寒。北征通萬里,東去接三韓。駟馬今安在?吾生愧滿顔。” ○倪謙詩:“曾聞鴨江水,今日過江心。斷岸千尋闊,堅氷十丈深。善行東馬健,能迓遠人欽。異境分夷夏,靑山自古今。” ○張珹詩:“鴨綠江頭萬頃波,今朝又載使星過。沙禽水鳥風濤靜,岸草汀花雨露多。桂棹乘流輕似羽,雲山入望翠如螺。鳳池龍沼相違久,回首其如憾慨何?” ○金湜詩:“慣看山色與江波,恍惚薰風四月過。到岸已知潮信早,登程不厭路岐多。農夫戴笠鋤禾黍,海客乘舟拾蚌螺。一片越南風景在,經行無乃野情何?” ○祁順詩:“樂浪分疆近接遼,一江中隔綠迢迢。源從長白穿山骨,流出東瀛雜海潮。兩岸山光晴浸玉,四時雲影冷涵霄。行人不v002_393b用招魚鱉,自有堅氷爲作橋。” ○王敞詩:“水暗長江萬頃秋,樓船誰遣候沙頭?獨憐破浪如飛渡,不信投鞭可斷流。風颭旌旄翻赤幟,夜寒戎幕擁靑油。不須銅柱遙分界,隔岸人家是義州。”
玉江。在州東北六十里。有二源:一出天磨山,一出呂子山。至山羊遷合,又西流五十里,入于鴨綠江。江中産淡靑玉,故名之。
古津江。在州東南三十六里。其源有三:一出天磨山東南,一出西南,一出普光山北。至彌勒堂俱合,經古定寧十餘里,至廣化里爲此江。又南流經古寧州,至古麟山,西流入鴨綠江。天順年間,書狀官姜耆壽溺死,故又稱“書狀江”。
於赤島。在蘭子島北。周十七里。其中平衍,墾田六十餘頃。
黔同島。在州西十五里。周十五里。鴨綠江到此分三派,而島在二洲間。有三氏梁,凡渡江者必由島北赴京使臣入朝之路。
威化島。在黔同島之下。周四十里。兩島之間,有鴨v002_393c江支流隔焉,稱爲掘浦。距州城二十五里。上三島,其地俱沃饒,民多耕墾。天順五年辛巳,農民爲建州衛野人所虜,自後官禁耕墾。○高麗辛禑謀攻遼陽,次平壤,督徵諸道兵,衆號十萬,使我太祖將之。左右軍渡鴨綠江,屯威化島,亡卒相繼於道,禑命所在斬之,不能止。禑遣宦者金完督令進兵,太祖乃諭諸將曰:“若犯上國之境,獲罪天子,宗社生民之禍立至矣。盍與卿等見王,親陳禍福,除君側之惡,以安生靈乎?” 諸將皆曰:“吾東方社稷安危在公一身,敢不惟命是從?” 於是回軍渡鴨綠江,太祖乘白馬,御彤弓、白羽箭,立於岸,遲諸軍畢渡。軍中望見相謂曰:“古今來世,安有如此之人乎!” 時霖潦數日,水不漲,及旋師纔渡岸,大水驟至,全島墊沒,人皆神之。
蘭子島。在威化島北。周十里。水落則連陸。
鳥沒亭島。在州西七里。周二十里。
鎭兵池。在麟山鎭城南。
臨德池。v002_393d在古麟山。
老土洞,以下竝係鴨綠江外之地。甘昌洞,孫梁洞,申胡水洞,金昌洞,馬子山,多湯洞,婆娑鋪,沙吾郞山,兄弟山,大母城,權豆山,小昌山,大昌山,松鶻山。
土産
絲,麻,蜂蜜,訥魚,秀魚,銀口魚,錦鱗魚,鱸魚,石硫黃,出客舍庭中。淡靑玉,水泡石,白芷,弓幹木,蟹。
城郭
州城。石築。周一萬四千八十三尺,高十二尺。內有四十井。〔新增〕 今上十五年,以舊v002_394a城狹隘,遣高荊山巡審便否,遂拓基改築。周二萬七千五百三十一尺,高十二尺。東南西北皆有門,門有擁城。城中有一池、四十三井。
關防
方山鎭,在州東北六十一里。我世宗朝築石城。周八千七百八十二尺,高八尺。內有七井及軍倉。有兵馬僉節制使營。麟山鎭。在州西南三十八里。我世祖朝築石城。周八千二百六尺,高九尺。內有九泉及軍倉。有兵馬僉節制使營。○已上,僉節制使各一人。
水口堡。在州東二十八里。舊置萬戶,今廢。夏則遣權管守禦,冬則疊入本道。沿邊他堡同。成宗二十四年築石城。周二千四百七十三尺。
靑水堡。在州東北九十五里。舊置萬戶,今廢。遣權管戍之。成宗二十四年築石城。周一千六百八十六尺。
所串堡。在州東南三十五里。俗號v002_394b大母城。冬則遣助防將守禦,春夏罷。成宗二十三年築石城。周七千七百十二尺。內有五井。
〔新增〕 姑未城堡。在州東北八十七里。石城。周六百四十六尺,高七尺。
廣坪堡。在州東一百十五里。石城。周一百十尺,高八尺。
玉江堡。在州東北五十里。石城。周七百四十四尺,高五尺五寸。
松山堡。在州東十二里。築甎城。周八百五十五尺,高八尺。嘉靖丙戌,堡內失火,民家及城子盡燒,節度使鄭允謙改設木柵。已上四堡,設權管戍之。
城古介堡。在州東六十里。石城。周八百九十尺,高九尺。冬則節度使遣助防將戍之,氷解則罷。已上五堡,弘治庚申,警邊使李克均設。
烽燧
統軍亭峯烽燧。東應水口,南應威遠。
水口烽燧。東應v002_394c金同田洞,西應統軍亭峯。
金同田洞烽燧。在州東北七十四里。東應老土灘,西應水口。
老土灘烽燧。在州東北九十七里。東應朔州府田往仇非,西應金同田洞。
威遠烽燧。在州南二十六里。北應統軍亭峯,南應刀山。
刀山烽燧。在州西南四十八里。北應威遠,南應龍川郡龍虎山。
〔新增〕 亭子山烽燧。在姑未城堡東北八里。東北應老土灘,西應金同田洞。
松峯烽燧。在方山鎭南三里。東北應金同田洞,西應浮洞。
浮洞烽燧。在玉江堡西十里。東北應松峯,西應水口。
石階烽燧。在松山堡東北八里。東北應水口,西應九龍淵。
九龍淵烽燧。在州北八里。東北應石階,西應統軍亭峯。
吳彦代烽燧。在州西十里。東北應v002_394d統軍亭峯,西應古靜州。
古靜州烽燧。在州西二十五里。東北應吳彦代,西應鎖兒岾。
鎖兒岾烽燧。在州西二十八里。東應古靜州,西應麟山鎭。
麟山鎭城西隅烽燧。在鎭城內西。東應鎖兒岾,西應岐伊城。
岐伊城烽燧。在麟山鎭西六里。東應麟山鎭,西應鎭兵串。
鎭兵串烽燧。在麟山鎭南九里。東北應岐伊城,西應彌勒堂。
彌勒堂烽燧。在麟山鎭南二十里。東北應鎭兵串,西應于里巖。
于里巖烽燧。在麟山鎭南二十五里。東北應彌勒堂,西南應龍川代山。
樓亭
統軍亭。在客館北。○任士洪記:“州城枕鴨綠江,其北則女眞氏之域,其西乃上國v002_395a之境。島嶼之縈紆,岡巒之崒峍,所謂大昌、小昌、松鶻諸山層出疊見於遠近,因可以想中華山河城郭之壯麗。而直州之北有峯突起,通四方而聘望,其上有亭,名曰‘統軍’,不知創於何時,名於何人。淸城韓侯千孫出牧于玆,謀諸通判金君哲孫,增其舊制,易以瓦屋。戊戌夏,余以罪直隷于州,而亭之工役甫訖,輪奐翬飛,宏敞軒豁,其望益遠,而其景益勝。一日,侯肅州之佐吏,揚觶其上,設鵠於下,以落其成,羈管鄙生得與席末。侯曰:‘有義以來,峯之高峻,固已如此,不知幾人登眺,以舒去國離鄕之懷。夫山而有亭,亭而有名,固其常也。余旣曾倅玆邑,今又作牧。子亦爲王喉舌,以至于都承旨,而衝犯大罪,落落然藐在絶域,麋鹿之與遊,尤州之所罕聞而稀見。余之重臨,一難;亭之告成,二難;子之來謫,三難。而子若無記,後之登此者,曷由知三難不易之義乎?’ 遂屬簡於羈客,幷請書額。余於作文寫字,俱所未能,然承侯有命,不敢以拙辭。v002_395b余惟錄州之籍,無慮萬餘戶,治民之務,不爲不殷,統軍爲名,何哉?內地而州縣者,戎車之賦非不重也,而主於治民;邊圉而藩屛者,編民之政非不務也,而專於訓鍊。是則國家於軍民之事,未嘗不岐而爲二,亦未嘗不合而爲一,由州郡所在之地而牧守、軍旅之職亦異。此州之地,極吾東方西北之界,南距京師千五百餘里,三方控于異國。故來莅是邦者,必才兼文武,政通軍民,然後乃克居之。今侯爲朝議所右,再典于玆,開藩鎭,對夷夏。其恩如春,則能使老幼煕煕;其威如秋,則能使部伍肅肅。接中華賓客,盡其誠敬,以彰我殿下事大之禮;待殊俗,順其來去,極其撫綏,以奉殿下推其無外之仁。是侯之爲政,主於一而兼於二,摠其大而擧其小者也,宜其膺國家分憂分閫之重寄,而得專一方之命也。至若犒師之餘,親率貔虎之士,千萬爲軍,布鎭于玆亭之下。欲左,左;欲右,右,坐作進退,號令嚴明,紀綱整肅。運籌一堂之中,折v002_395c衝千里之外,屈人兵於不戰,則豈非斯亭之爲名足以見侯之師律而非架空之虛稱也耶?” ○金克己詩:“龍灣轉處保州城,馬上遙瞻眼更明。珍重統軍峯一朶,隔江奔走笑相迎。” 〔新增〕 曺偉詩:“百雉層城迥,朱欄盡日憑。寒垣嚴虎豹,溟海轉鵾鵬。地勢西南柝,天容上下澄。徘徊無限意,豪氣倍陳登。” ○“馬訾分疆遠,龍灣古塞空。江爲襟帶固,地作翰屛雄。三島耕犁外,孤城聚落中。晩來長嘯立,斜日滿江橫。” ○“四顧都無礙,茫茫萬象奔。片心窮宇宙,兩眼隘乾坤。日落江光動,煙消海氣昏。將軍今郤縠,鎖鑰國西門。” ○“形勝由來獨,金湯萬古聞。儲胥臨古月,睥睨鎖寒雲。鼓角軍聲壯,河山境界分。止戈資廟略,莫倚久修文。” ○權達手詩:“古塞城千雉,華亭客共憑。山形圍澤國,島勢墮雲鵬。水作三叉闊,江涵萬象澄。醉來豪興發,長嘯學孫登。” ○“地窮江作界,天闊樹浮空。鎭在關西阨,亭臨塞北雄。雲生靑嶂外,人倚夕陽中。自笑顔衰久,三杯且v002_395d發紅。” ○“一上玆亭上,群山眼底奔。闊容呑楚澤,大欲納乾坤。雲影兼天靜,城陰帶水昏。江光晩更好,留待月侵門。” ○“西塞今重到,形便昔所聞。貔貅弓引月,鼓角陣開雲。戎馬長年戍,關河此界分。將軍當代選,能武又能文。” ○許硡詩:“關河迢遞若爲情?欲上燕然勒姓名。地盡鴨江春水闊,城臨威島暮雲平。年來許國心空在,夜靜聞笳夢自驚。倚柱微吟歸思切,任敎斜月到簷明。”
義順館。舊名望華樓。在城南二里。鴨綠江濱。迎候中朝使臣之所。我世祖朝,撤樓置館。○李詹詩:“常怪平生似子陽,遠遊中國得觀光。東還勝日登高閣,北望群山接大荒。雲起塞天歸浩渺,花隨春浪入蒼茫。無窮往事難收拾,吟罷新詩一叫長。” ○鄭夢周詩:“驅馬悠悠到浿江,陪臣直欲且觀光。去家漸覺遙千里,擧酒須知隘八荒。靺鞨水邊山疊疊,遼陽城下路茫茫。夜深逆旅不成夢,一曲漁歌聲短長。” ○陳嘉猷詩:“渡江還復憩江頭,望外煙林v002_396a接遠汀。暖浪一川浮鴨綠,晩山兩岸結螺靑。柳鸎春老聲猶滑,松鶴巢深夢未醒。東去藩京尙千里,聞歌《四牡》幾回聽?” ○“萬里天涯遠客過,紅亭綠酒意如何?扶餘地脈臨江盡,遼左山光隔岸多。節指京畿催曉騎,恩覃海國漲晴波。西行自是還朝路,不用《陽關》向我歌。” ○金湜詩:“臨風駐馬午煙生,便算東行第一程。斷岸靑山松頂合,長江綠水鴨頭平。歌聲載道人皆悅,草色連天物共榮。華館坐來香滿室,陪臣共宴達王情。” ○“東藩人物舊儒流,來往多煩作伴遊。華館淸尊陪我醉,錦囊佳句爲誰留?松山雨過消殘暑,鴨水風生判早秋。珍重國王分別後,莫敎頻上大平樓。” ○張珹詩:“江頭綠草喚愁生,莫對愁人算客程。一榻好風時雨送,半山殘日暮雲平。賢王已盡殷勤意,歸使應傳賜賚榮。更喜判書如舊識,詩成唱和不勝情。” ○祁順詩:“公館筵開白晝遲,滿盤殽核列珍奇。醅分綠水香浮甕,屛擁靑山影倒帷。雲錦製餘花燦爛,色絲v002_396b粧就鳳差池。聖朝德化今無外,喜見殊方重禮儀。” ○李穀《望華樓》詩:“身世悠悠入倚樓,此樓更在國西頭。請看客裏光陰疾,樓下長江衮衮流。” ○李穡詩:“儒衣幾見開城吏?使節重爲書狀官。百尺江樓高突兀,落霞孤鶩凭欄干。” ○李邦直詩:“東還試上國西樓,萬景來供一轉頭。遠塞雲晴山不盡,長江風定水安流。” ○王敞詩:“詔奉金泥過海邦,馬頭鼓吹擁旌幢。平林路杳斜通郭,闊野天低半入江。雉獻越裳皆效貢,表函全蜀盡脩降。扶餘咫尺分遼水,秉禮由來俗更厖。”
聚勝亭。在客館東。○弘治甲寅,牧使具謙建。〔新增〕 洪貴達記:“州之客舍東有地,窿然而墟,草樹蒙翳,鷄豚狗彘所溷穢,舊無有省視之者。弘治紀元之六年,綾山具公謙牧于州,始相而異之,剔其翳,去其穢,夷其窿,亭于其上翼如也。客未登而綾山逝,傷哉!八年春,今牧使黃公衡繼而理,屬邊境無事,其民不見有兵革,則日惟賓客燕遊之具是事。曰:‘客舍v002_396c大矣,然鬱而不得肆;統軍亭豁矣,然高而不可常,其斯亭乎。’ 乃畢綾山未畢之功,庭除夷曠,軒戶開豁,坐可以極目湖山數十里之遠,眞勝槪也。是年,皇帝遣金太監輔、李太監珍、王行人獻臣來,錫我成宗諡及上誥命。盧公公弼、宋公軼、金公諶迎慰于江上,雖以兼善之不才,亦忝爲接伴使,咸集于玆。牧使尊俎于亭,倩客置之上座,時化日融暖,薰風南來,披襟當之,快哉!如執熱者之濯淸水也。牧使酌而言曰:‘亭無名,請名之。’ 盧公曰:‘噫!亭,吾當名之。夫東方地脈,至此而盡,其蜿蟺淸淑之氣,必磅礴而轇輵於江之滸矣。中州之山,亦臨水而止,常送靑輸翠,繚遶于統軍之簷牙。統軍上呑三光,旁挹萬象,俯壓而輸瀉之。斯亭也,皆能承受而蓄聚之,爲遊人勝賞,盍名之曰「聚勝」?況吾與諸公膺朝選以來,迎天子之景命,會於斯,觴於斯,非幸歟?雖謂之「聚勝」,又何不可?’ 皆曰:‘善。’ 於是相與更酌,醉而臥,醒而起。書其言以爲記。” ○盧公v002_396d弼詩:“聚勝亭高鎭塞陲,登臨覽物極纖微。長江縹渺連滄海,遠樹玲瓏帶落暉。滿地雪花梨半謝,飜空翠浪麥初肥。老來未減湖山癖,醉倚雕欄逸興飛。” ○曺偉詩:“雄藩自昔壯邊陲,新構華亭對翠微。絶域雲煙來醉眼,層城花柳媚晴暉。山圍廣野靑如畫,雨過長江綠漸肥。叵耐登臨還望遠,歸心日夜正南飛。” ○崔淑生詩:“馬蹄西海到窮陲,百尺危亭近紫微。且倚雕欄看勝景,不敎珠箔障晴暉。江橫鴨綠兼天淨,柳暗鵝黃着雨肥。忽憶玉堂身萬里,蓬萊何處五雲飛?”
學校
鄕校。在州城內西。
譯學。在州西。
驛院
義順驛。卽義順館。
所串驛。在州南三十三里。
方山驛。在方山鎭。
古津江院。在古津江岸。
蓋武院。在州東南五十一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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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倉。在客館北。○本道鐵山、郭山、定州、宣川、龍川等官租稅,皆納于此。
〔新增〕 所串倉。弘治庚申,警邊使李克均設。移定寧倉米穀以實之。
佛宇
彌勒寺,金剛寺。俱在松山。
觀音窟,寶羅寺。俱在馬頭山。
佛藏寺。在天磨山。
祠廟
社稷壇。在州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城內北。
鴨綠江祠。在九龍淵上。祀典與長湍、德津及平壤江同爲西瀆,載中祀。春秋降香祝致祭。
厲壇。在州北。
古跡
國內城。一云不而城。高麗瑠璃王二十一年,郊豕逸,王命掌牲薛支逐之。至國內v002_397b尉那巖得之,拘於國內人家養之,返白王曰:“臣逐豕至國內,見其山水深險,地宜五穀,又多麋鹿魚鱉之産。若移都,則不惟民利之無窮,亦可免兵革之患。” 王親幸觀地勢。二十二年冬,王遷都國內,築尉那巖城。歷四百二十五年,長壽王移都平壤。○今按:鄭麟趾《高麗ㆍ地理志》“麟州有長城基,德宗朝,柳韶所築,起自州之鴨綠江入海處”,又《兵志》“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則國內城當在古麟州境內。金富軾《高句麗地志》則云:“國內城未知的在何處,當在鴨綠以北漢玄菟郡之界、遼東京遼陽之東。” 未詳孰是,姑從鄭說附此。
古靜州。在州南二十五里。本高麗松山縣。德宗二年,築城爲靜州鎭,徙民一千戶以實之。文宗三十一年,又徙內地民百戶。城周一萬二千六百十尺。本朝太宗二年,州廢來屬。世宗朝又築石城,周二千七百七十尺,內有五井。
古麟州。在州南三十五里。本高麗靈蹄縣。顯v002_397c宗九年,稱麟州防禦使。二十一年築土城,俗號鳥餘,周一萬一千一百尺。移永平鎭民實之。高宗八年,以叛逆降稱含仁,後改知郡事。本朝廢州來屬,世宗朝置麟山鎭。
古靈州。在州南五十五里。本高麗興化鎭。顯宗二十三年,陞靈州,置防禦使。本朝廢州來屬。有土城基,周一萬二千五百八十尺。○高麗顯宗元年,契丹主自將來,討康兆,圍興化鎭。楊規爲都巡檢使,與戶部郞中鄭成、副使ㆍ將作主簿李守和、判官ㆍ廩羲令張顥嬰城固守。契丹主詐爲兆書,遺興化鎭諭降,楊規曰:“我受王命而來,非受兆命。” 不降。後,契丹蕭遜寧來侵,以姜邯贊爲西北面行營都統使,大將軍姜民瞻副之,帥兵二十萬八千人,屯寧州。至興化鎭,選騎兵萬二千,伏山谷中,以大繩貫牛皮,塞城東大川以待之。賊至,決塞發伏,大敗之。
古定寧縣。在州東南二十五里。我太宗五年,初置縣令。世宗二十七年,移于方山,陞v002_397d爲郡。世祖元年還舊邑,二年廢縣來屬。有軍倉。
古威遠鎭。在州南二十五里。高麗顯宗二十年,遣柳韶修古石城,置威遠鎭,在興化鎭西北。城周四千八百四十尺。內有七井。
古寧德鎭。在州東南四十里。高麗顯宗二十一年築土城,周四千十二尺。內有十二井。文宗避契丹興宗諱,改稱寧德城,以鎭字從眞也。本朝改定寧縣,後罷縣來屬。○高麗高宗四年,金來遠城移牒曰:“叛賊萬奴本與契丹同心,若倂軍往侵貴邦,其患不小。且爲貴邦所擊,則必奔還我國。苟犯貴邦,宜急報之,我卽出軍掩擊。” 寧德城回牒曰:“丹兵曾入我疆,屢致摧挫。若萬奴繼至,恐分我軍力,以致丹寇復振。若侵上國,事在俄頃,未可及報。請預設兵馬,遮阻萬奴,使不至於弊邑。弊邑亦堤防丹兵,無使至於上國。”
古寧朔鎭。在州東一百二十里。高麗文宗城安義鎭榛子農場爲寧朔鎭,以扼蕃賊要衝。城周v002_398a七千七百六十尺。今有土城遺基。內有三井。
古定戎鎭。在州東八十里。柳韶又修興化鎭北古石壁,置定戎鎭,徙永平城民實之。築土城,周七千七百九十二尺。內有三井。俗號臨川城。
古延平城。在州東南八十里。土築。周四千八百八十七尺。內有十三井。今只有遺基。
古延州城。在州東二十八里。土築。周四百八十尺。今只有遺基。
玉江城。在玉江東岸。石築。周六百二十尺。四面絶壁,中有池。
箭門嶺古城。在州東南二十里。土築。周一萬一千六百十尺。內有六十二井。
嘉彌城。在州北一百里。石築。周七千三百尺。無井泉。
長城。高麗德宗二年,命平章事柳韶創置北境關防。起自州之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四城,抵耀德、靜v002_398b邊、和州等三城,東傅于海,延袤千餘里。以石爲城。高、厚各二十五尺。俗號萬里長城。在州東玉江里北者,長三百二步;在九龍淵北者,長四百十一步。
庫洞堡。
三岐堡。在州北。
黔同堡。卽黔同島。
暗林堡。
彌勒堂堡。在州西南四十里。
名宦
高麗 金仁存。出鎭龍灣,其門人餞于都門外,仁存作詩以贈曰:“十年臺閣掌絲綸,此日飜爲閫外臣。諫掖未能陳讜議,塞垣聊欲掃胡塵。鬢毛早白緣憂國,涕淚難禁爲戀親。多謝一門賢子弟,百壺淸酒送行人。”
金慶孫。高宗朝爲靜州分道將軍。蒙兵渡鴨綠江,侵及靜州,慶孫率衙內敢死士十二人,開門出力戰,蒙古却走。後復來攻,大戰二十餘日,慶孫隨機設備,應變如神。蒙古曰:“此城以小敵大,天所佑,非人力也。” 遂解圍而去。尋拜大將軍、知御史臺事。
金克v002_398c己。嘗佐龍灣,有詩云:“文章向老可相娛,一劍遊邊尙五車。衙罷不知爲塞吏,紙窓明處臥看書。”
本朝 李思儉,李茵,兪益明。俱爲牧使。
人物
高句麗 乙巴素。故國川王時,四部共擧東里晏留,王委以國政。晏留辭曰:“微臣庸愚,不足參大政。西鴨綠谷左勿村有乙巴素者,性剛毅,智慮淵深。若欲理國,非此人則不可。” 王厚禮聘之,拜中畏大夫,仍爲國相。巴素明政敎,愼賞罰,人民又安,內外無事。及卒,國人哭之慟。
密友,紐由,東川王時,魏幽州刺史毌丘儉來,陷丸都城。王欲奔南沃沮,至竹嶺,士卒皆散。密友獨在王側,募死士,與之赴敵力戰,王僅得脫,間行至南沃沮,魏軍追不止。東部人紐由進曰:“勢甚危迫,不可徒死。臣請往搞魏軍。” 遂隱刀食器,進前拔刀,刺魏將,與之俱死,魏軍遂亂。王引軍爲三道以逐之。v002_398d王復國論功,以密友、紐由爲第一。明臨答夫。新大王時爲國相。漢玄菟郡太守耿臨發兵來攻。王問群臣:“戰守孰便?” 答夫曰:“今漢人千里轉糧,不能持久。若我深溝高壘以待之,彼不過旬日,飢困而還。我以勁卒迫之,可以得志矣。” 王從之。漢人果不克,引還。答夫追之,戰於坐原,漢軍大敗。王大悅,賜答夫坐原及質山爲食邑。○已上三人,皆都國內時事,故附于此。
高麗 丁五甫。林衍擅廢立,聞世子東歸,遣兵待于鴨綠,將脅之。五甫夜渡江告變,世子還朝以聞。帝詔王復位入朝,衍憂懼,發疽死。
趙文拔。定戎鎭人。幼聰敏,讀書輒記,文詞淸警。擢魁科,累轉中書注書。嘗直宿省中,有一小胥寒甚,文拔憐之,許入被中,小胥狎加足腹上。其夜會頒政,省吏來報注書作正言,小胥徐收其足,文拔猶若熟睡。官至禮部郞中。
本朝 張思吉。本州土豪張氏不遵朝命,v002_399a國家政令不能及,思吉願隷我太祖麾下,自後無復反側。後爲開國功臣,官至花山府院君。諡僖襄。
〔新增〕 流寓
本朝 曺偉。
〔新增〕 烈女
本朝 伐等伊。百姓趙開同妻也。夫爲虎所攬,伐等伊大呼擊虎,虎棄去,夫得不死。事聞旌閭。
題詠
龍灣城外更無州。金克己詩:“辭家却嘆負春遊,匹馬西來已換秋。莫問客程凡幾里,云云。”
天低鶴野風蕭索。姜淮伯詩:“周家鳴鳳集朝陽,玉帛多方覲耿光。蕩蕩皇靈無遠邇,煌煌使節到遐荒。云云,地盡龍灣路渺茫。去國不知身漸老,坐聞柝邊下更長。”
古壘草深埋戰骨。權近應制詩:“江上孤城地自偏,桑麻閭井正蕭然。封疆尙賴將軍略,堡障須憑刺史賢。云云,荒村木老帶炊煙。今逢聖化東漸日,最喜遺黎得晏眠。”
v002_399b古國山河壯。安魯生詩:“奉節朝黃屋,回車尙黑頭。十年江海志,萬里道途愁。云云,荒城歲月悠。自憐違世俗,竟日獨憑樓。”
山徑連雲鑿。倪謙詩:“平明離義順,東去入王都。云云,松橋帶葉鋪。一程腰站短,幾處野村孤。馬首侏離子,音殊不受呼。”
天設雄關問幾春。姜希孟詩:“云云,地當門戶慣迎賓。貔貅百隊雲屯卒,煙火千家鼎食民。江勢愛侵城北岸,山形偏拱海東濱。登臨莫辨華夷界,萬古箕疇自有神。”
玉壺時送甕中春。前人詩:“云云,闢館羅羞慰遠人。慣打行裝煩驛騎,頻看面貌識邊民。黃鸝綠樹短橋路,紫鷰輕風淸澗濱。作客寧知詩力退?年年光景强傳神。”
八詠 任士洪詩。鴨水春波。“一帶長江萬古流,溶溶漾漾幾時休?春來新漲葡萄綠,瀲灩晴光可染鷗。”
鶻嶺暮雲。“胡山硉兀與天v002_399c齊,野色蒼茫入望迷。絶頂凝雲常漠漠,夕陽明處鳥飛低。”
松山旭日。“乍見銅鉦掛樹頭,紅光俄頃透江樓。邊城蔀屋知多少,炙背何人獻冕旒?”
海門飛雨。“黑風吹海碧天昏,龍戰雲鏖失遠村。遷客何能愁禁得?茅簷終日看翻盆。”
龍淵翠壁。“毒龍潛處水偏深,截壁嵯峨矗幾尋。獨有漁人時入釣,扁舟猶得繫楓林。”
鳥島黃蘆。“朔野迢迢入渺茫,蒹葭無際露爲霜。西風一夜花飛雪,疑是春天柳絮狂。”
凹橋祖客。“草遠長堤雨乍晴,溪橋落日別愁生。可憐嗚咽橋前水,知是無情似有情。”
平原獵騎。“野燒空原盡荻蒿,貔貅千騎擁旌旄。將軍校獵歸來晩,鼓角聲中新月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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